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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마음의 흔적들'에 해당되는 글 64
2009/05/04  미국에 한 6개월...  (2)
2009/02/06  듣게 해주어 고마워  (14)
2008/08/07  차용택 선생님  (11)
2008/05/10  마음고생, 2MB, 촛불  (6)
2007/12/13  Would you marry me?  (3)
2007/03/17  이 죽일(?) 놈의 술  
2007/03/09  맏이의 무게  (2)
2007/01/13  추성훈과 랜스 암스트롱  (6)
2006/11/24  Fiat voluntas tua  (2)
2006/10/20  눈을 보고 말해요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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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4  두 발로 서는 개  (4)
2006/01/09  2006년 1월 8일  
2005/12/26  세번째 고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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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6  김훈과 공지영  
2005/11/09  술 드신 아부지  (1)
2005/11/07  a struggle for life  (4)
2005/10/20  jen 선생님께 드리는 답변  (3)
 
 
 
 
회사에서 단기학술연수를 보내주는 게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고(UCSD)에 6개월짜리 Business Management program이라고 있는데,
지난 화요일, 최종적으로 선발 되어 6월 중순경에 나가게 되었다.

기획부에서 2년 고생했다고 배려해준다는 차원에서 선발된 것 같은데
만기제대 선물로 푹- 쉬다 올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다행이지 싶다.
가족끼리 하는 시간이 많아질 거라고 우리 오복엄마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지사고.

하지만, 연휴동안 비행기 하나 제대로 못 잡고
나갈 준비한다고 이것저것 어수선하게 보내고 출근을 코앞에 두자니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고보면 나에게 진정한 휴식이란 아무 고민 없이 비행기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게 아닐런지.
빨리 은퇴해서 도시 벗어나 마당 있는 집 짓고 개 키우면서 비행기만 줄창 만들어야지...

......

회사 기획부에서 지낸 2년간 참 별일이 다 있었지만
가장 큰 일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권력과 관료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직접 겪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일 거다.

물론, 거기에 맞춰 우리 회사가 처한 현실과 회사업무를
좀더 거시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은 긍정적인 거겠지만,
공기업이라는, 요새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조직의 기획부에서 폭풍의 시기(?)를 보내며 얻은 경험들은
매일아침 신문과 뉴스에 뜨는 소식들의 이면을 읽게 해주었고
그러한 표면의 저층에서 움직이는 많은 것들을 간파하게 해준 것 같다.
당연히, 절대 좋기만한 경험은 아니었고...

시선과 생각의 지평은 확실히 넓어졌지만,
지난 2년 동안 나의 입은 점차 더 말을 잃어갔고 나의 주관은 안개 속에서 부유했다.

터널을 빠져나온 뒤, 내가 빠져나온 터널에 대하여
태어날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6개월간의 짧은 떠남이 나를 다시 찾고, 나를 다시 단단히 할 수 있는
되살림과 채움의 시간이 되었으면 싶다.
2009/05/04 02:41 2009/05/04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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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  | 2009/05/04 12:27
오호라...이게 그거(?)였군요...^^

눈앞의 업무에서 해방된다는 면에서는 휴가겠지만...
두고두고 뼛골을 빼먹으려고 6개월 충전해주는 것일 수도...ㅋㅋ
게다가 비지니스 메니지먼트면...거의 당첨 확실~♬

그래도...축하할 일이네요.
이유야 어떻든 견문을 넓힐 기회고
회사도 쓸데 없는 데 투자하진 않으니까

계획한 거 다 이루길...
  | 2009/05/07 22:14
가기 전에 한번 뵙고 가고 싶습니다. 5월중에 연락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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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시죠? 성인보다 2배 이상 심박수가 빨라요."

길이 0.5cm 밖에 안되는 작은 생명이었지만 그 박동은 너무나 힘차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심장소리를 듣는 그 순간 나의 삶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완전히 달라질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6주 그리고 이틀밖에 안된, 손톱보다도 작은 저 태아의 힘찬 고동이 이제까지 오직 나만 알던 개인주의적인 삶, 사람과 생명을 '개체'로 보던 건조한 가치관을 순식간에 용해시켜버렸고 나를 '생명''책임'이라는 경외로운, 그러나 엄숙한 세계로 인도해갔다.

집사람이 임신인 것 같다고 얘기했을 때도,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어진 것을 확인했을 때도 크게 와닿지 않던 느낌은 이렇게 움직임과 울림이라는 공감각으로 결합해서야 내게 비로소 한없는 경이로 다가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가야,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거라.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고 놀라운 너의 심장소리가 부모에게 '생명'이라는 엄숙한 가치를 처음으로 가르쳐주었구나.
2009/02/06 23:55 2009/02/0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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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젠3촌  | 2009/02/07 12:45
축하드립니다
  | 2009/02/10 00:48
업어키울 생각 안하고 어딜 도망가는 것인가?! -_-;;
2젠 엄ma  | 2009/02/07 21:06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심장박동을 들으셨다니 너무나 신기하고 기쁘셨겠어요.^^
  | 2009/02/10 00:49
같이 들었잖앗!!!! -_-;;
뽀~*  | 2009/02/09 19:25
감축드립니다*^^*
콩닥콩닥 뛰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죠...히야~♬
아마 지금부터 안정기가 될 때까지가 아기 엄마에겐 제일 적응하기 힘들 때일 겁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후환이 없답니당...ㅋㅋ^^v)

Life is full of wonder...^^*
  | 2009/02/10 00:50
네, 정말 Life is full of wonder라는 말이 그토록 와닿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소리 녹음해둘 걸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앞으로는 모형 뿐 아니라 육아에 대해서도 여쭤볼 일이 생길 듯 합니다. :)
이중원  | 2009/02/10 01:41
아 너무 축하드립니다!!! 얼마나 기쁘신가요 ^^
형수님이 다신 댓글도 재밌내요 :)
  | 2009/02/17 00:34
감사합니다. 최근에 중원씨가 만드신 F-4B VF-111 보고 뻑 갔는데...저도 애아빠 되기 전에 빨리 선다우너즈 팬톰 하나 만들어보고 싶네요.
qustus   | 2009/02/16 10:29
축하해!!!! 근데 딸이야 아들이야? 음~ 내 생각엔 제수씨 닮은 딸이나 제수씨 닮은 아들이 좋을 거 같아!! ^^ 정말 축하한다!!!
  | 2009/02/17 00:37
집사람 의견으로는 아들이 아닐까 한다는데... 성별은 좀 있어야 판가름할 수 있나봐. 나로서는 아들이나 딸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한동안은 아들일지 딸일지 궁금해하는 재미(?)가 있을 듯.
박수원  | 2009/02/16 17:02
축하드립니다.
센스 작렬하시는 안주인님의 댓글에 쓰러지네요......
순산 하시는 날까지 건강하세요.
  | 2009/02/17 00:38
요새 입덧이 심해져서 많이 힘들어하더라구요. 몸조리 잘하도록, 그리고 아기와 엄마 모두 건강하도록 곁에서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구스타프  | 2009/02/18 01:40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한번 뵈야죠? ^^;
  | 2009/02/21 23:40
정말 못뵌지 오래되었는데...매번 해외출장이시고 서로가 너무 바빠 짬을 내기 어려웠네요~ 그래도 사업 번창하시니 정말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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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선생님을 안다.

십 수년전, 내가 고등학교 1~2학년 때였을까.
키가 작고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국어선생님이 한 해 동안 우리반 국어수업을 맡은 적이 있다.
키가 작아 앞에 앉았던 나에게는, 역시 키가 작은 그 선생님의 얼굴이 피부까지 잘 보였고 교실 뒷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을, 그 선생님 얼굴에 있는 큰 흉터자국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업 첫 날,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 갑자기 교탁 위에 앉았다.
세상 모든 일에 따분해하던 남자 고등학생들의 시선은 갑자기 교탁 위로 모아졌고 그 선생님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름과 별명 - 선생님은 자신의 별명이 '똥차'라고 했다 - 밖에 없었고 그 외에는 그저 그런 농담으로 채워졌던 것 같다.

교탁 위에 터억- 하고 앉은 키 작고 못생긴 선생님에게 잠깐이나마 시선을 두었던 아이들은 이내 무관심해졌다. '특이한 선생님이네...' 정도의 생각은 가졌겠지만 모든 것이 시니컬하고 따분했던 10대의 소년들에게는 선생님의 수업 첫날, 첫 소통의 방식이 관심 밖이었을 거다.

그 뒤로도 선생님과 아이들의 '섞이지 못함'은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주로 수업 진도보다는 다른 얘기를 많이 했고 아이들은 더더욱 시니컬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간혹 무언가 우리에게 강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보이던 당당한 눈빛 때문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잡담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같아 보이던, 작은 키지만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우뚝 서 형형한 눈빛을 내던 그 당당함의 본질이 무엇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필경, 내 친구가 얘기해준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라는 선생님의 이력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까지 '전교조 출신 교사'를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그 선생님에 대한 느낌이란
마치 베를린 유학생들이 독일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접촉하고서 '아, 이 사람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지 않구나' 하면서 어느 정도는 놀라고, 어느 정도는 신기하고, 어느 정도는 마음저린... 그러한 비슷한 것이었다.

......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1989년, 전교조가 출범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해직되고, 고통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
- 가끔 기억이란, 강력한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기도 한다.

어느 교실... 교단 위에 한 선생님이 지휘봉('매'일 것이다)을 들고 다리를 꼰채 당당하게 앉아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교실 문 앞에는 또하나의 선생님이 책 몇권을 든채 어색하게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그걸 제대로 지켜보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자습을 하던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 '두 담임선생님'의 기묘한 共存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 교실 문 앞에 고개를 떨군 선생님은 바로 어제까지 그 반 학생들의 담임이었던,
그러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바로 오늘아침 해직을 당한 교사이고
교단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당당하게 아이들의 자습을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은
오늘 아침 새로이 이 반을 맡게 된 새 담임교사였다. -

.....

그렇게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교단에 서지 못할 때 나는 그 소용돌이의 외곽에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이었고(초등학교는 전교조 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다)
전교조란 신문의 사진을 통해서, 그리고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학교생활을 이야기할 때 간혹 들리던
나와 큰 관계 없는 '외부의 사건'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눈 앞에 지금 '전교조 출신 해직교사'가 서 있다.

.....

또 하나, 선생님에 대해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선생님의 독특한 수업방식 때문이었다.
시험 며칠을 앞두고서 1-2개 단원을 주마간산으로 지나가는 일이 잦을 정도로 수업진도 맞추는 일에는 큰 관심도, 큰 능력도(훗날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나의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없어보였지만, 특이하게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항상 무언가를 꺼내고 싶어하고 소통하고 싶어했다.

국어와 크게 관련은 없지만, (그렇다고 시사적인 내용과 관련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무언가 농담 비슷한 식으로 화제를 던지고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우리에게 물었다.
그렇게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다.

... 하지만 머리굵고 세상 모든 일에 귀찮은 10대 소년들은 아무도 그 소통에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고 그것이 하나의 '분위기'가 되어 모두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 선생님의 제안에 응하는 녀석은 혼자 잘난 체 하는 것 같고, 재수 없어 보인다는 것처럼.

그렇게... 묘하게 동의된 억압의 분위기가 정말 싫었지만,
선생님이 던져주는 질문들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도 용기 없는 비겁자에 불과했다.

비겁자라는 것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는 뜻만은 아니다.
나는 선생님이 벌이고 싶어했던 소통의 장을 넓힐 수 있는 권력을 가졌음에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먹 깨나 쓴다는 애들 사이에 존재하는 '주먹의 권력'이 아닌, 소위 우등생축에 들어 아무도 나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다는, 우등생들과 모범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우등생으로서의 권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나는 선생님이 제안한 소통의 장을 함께 열려 하지 않고 그 불씨를 꺼뜨려버린 비겁자였던 거다.

나는 분명히
선생님이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위 '강남 8학군'의 아이들이라는, 그래서 다른 고등학교보다 더 시니컬하고 더 잔머리를 잘 굴리는 (선생님이 우리들의 '계급'을 더 의식했을지는 알 수 없다. 전적으로 나의 생각에 불과하다) 이 녀석들과 한 바탕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그런 시그널을 계속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도 끝없는 우리들의 무호응에 조금씩 지쳐갔고 나는 그런 선생님의 지쳐감을 보면서 속으로 비겁자의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었다.

".... 에이, 수업이나 하자, 책 펴!" 라는 말.
나에게는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던 선생님의 마지막 의지가 닫히는 말로 들려 참 싫어했던 말이었다.

.....

그렇게 한 해가 갔다.
반 아이들, 어느 누구도 그 해 끝까지 국어수업을 좋아하는 녀석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날이 되었다.

무미건조한 수업이 끝나고 10분 정도가 남았다.
선생님은 책을 덮고 준비한 쪽지들을 나누어주었다.

"한 해 동안 나랑 같이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다.
그간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 수업에서 개선할 점, 뭐 그런 것들을
이 쪽지에 써서 나한테 주면 참 고맙겠다."


종이가 뒷줄로 전달되었다.
반 아이들은 그냥 몇글자 끄적이고 접어서 다시 앞으로 쪽지를 전달했다.
자다가 깬 애들은 귀찮다는 듯 쪽지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그냥 접어 앞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쪽지가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던 선생님의 마지막 제안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나와 선생님이 쪽지를 통해 둘만이서 대화를 하는 거니까,
1년 동안 국어시간에 교실을 채우던 그 무호응의 동맹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비겁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기 전의 짧은 시간, 많은 내용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이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지지해왔다고,
우리 반 누구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저만큼은 선생님이 다른 반, 다른 학교에 가서도 그러한 방식을
계속 고집해주길 바란다고... 그런 내용을 써내려갔다.

"뭘 그렇게 많이 쓰냐?"

뒷 자리에 앉은 녀석이 자신의 쪽지를 전달하면서
꾸물거리는 나에게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못하고 쪽지를 두세번 접어 나 역시 앞으로 전달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비겁했다.

... 내 생각과 달리 선생님은 쪽지를 그 자리에서 열어보지 않았다.
남고생들이 적은 시시한 내용의 쪽지를 심드렁하게 읽다가
제법 길게, 선생님의 방식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나의 쪽지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슬며시 웃음을 짓는, 그 웃음이 쪽지의 주인공인 나의 마음도 뿌듯하게 해주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모은 쪽지뭉치를 들고 선생님은 그렇게 교실을 급하게 나갔고
교실은 다시 아이들의 왁자지껄거림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이 내가 선생님을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

선생님이 교무실에서나마 그 쪽지를 읽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전교조였던 선생님이 과연 우리들을 '계급'적으로 인식하고
강남아이들 특유의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나의 과대망상(?)일 가능성이 크지만)

하지만, 아직도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아프고 부끄럽다.
비단 차용택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려했던 많은 선생님들에게
'우리'와 '내'가 보여주었던 차가운 무호응들, 그리고 교실 안을 지배하던 어그러진 동의를 깨지 못하고
그 무호응의 카르텔에 협력했던 비겁함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학교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고, 움직일 공간이 많았던 소위 '우등생'이었던 자였기에
내가 느껴야할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용기있는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답할 수 없다.
내가 선생님 앞에서 낼 수 있었던 용기의 크기는
선생님이 나에게 건네준, 4등분한 16절지 갱지 쪽지의 크기에 불과한 하찮은 것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선생님이 그때의 쪽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한 가지만큼은 들어주셨으면 하는 게 있다.
여전히 비겁하고 소아적으로 살고 있지만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던 영화 속 대사처럼,
적어도 괴물은 되지 않기 위하여 계속 그 쪽지의 크기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
매일매일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선생님이 가르쳤던 많은 고등학생들 중에서 그 쪽지를 썼던 고등학생이 누구였는지 몰랐겠지만
많은 군중 속에서 그렇게 하나 둘 고군분투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름모를 제자들이 많을 거라는 것.
선생님이 건넸던 소통에의 제안이 가져온 결과는
당장의 차가운 무호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먼 훗날, 이름 없는 제자들에 의해 조금씩 넓어져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길이고 보람이 아닐까.
2008/08/07 22:42 2008/08/0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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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상하이강낭콩밭  2008/10/19 17:13
일 년을 마주하고 헤어지지만, 실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소통이다.
차용택  | 2008/08/08 23:14
지나친 표현으로 나를 쑥스럽고 부끄럽게 하는구나.
언남고등학교 - 복직된 첫 학교였어. 4년 반 만에 학교로 돌아간다는 기쁨과 오랫만에 만나는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두근거림을 함께 가지고 출근했었지. '국어'라는 게 소통의 방법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 문법적으로 정확한 말을 배우기도 해야 하겠지만 언어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대로 다 해주는 게 교육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교육 자체가 안 된다고 믿어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했어. 그런데 언남에서의 첫 두 해는 참 어려웠어. '줄 타고 나는' 님이 말한 대로 무엇으로도 아이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었지. 진도 나가면 자고, 교과서에 없는 이야기 하면 떠들고, 농담하면 썰렁하다고 하고......4년 반의 공백 때문인가? 강남의 특징인가? 무척이나 고민했었어. 3,4년 째는 많이 나아졌어. 4년째 만났던 아이들과는 지금도 연락이 돼. 지금?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아이들과의 소통은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결국 그때 내게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너희들이 매긴 성적표 - 물론, 교무실에 가져와 열심히 읽었지. 지금도 학년말에는 아이들이 내게 부여한 성적표를 받고 있어. 낙제는 겨우 면하는...
  | 2008/08/08 23:57
선생님께서 친히 댓글을 달아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93~95년도에 언남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93년도 1학년, 94년도 2학년 문과반, 95년도 3학년 문과반)이었습니다. 이름은 '윤현중'이라고 하고, 친구 중에 '정희송'군이 당시 선생님을 곧잘 따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이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 중에 정주현, 정형기, 김재철, 장윤덕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셨지요.

언남고등학교에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 그리고 제가 그 힘듦에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 난곡의 아이들처럼 반갑게 선생님을 찾고 그럴 순 없을 것 같지만 선생님이 키워 이제 사회에 나온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와 삶의 후배로서 항상 많은 점을 여쭙고 만나뵙고 싶고 그렇답니다. 괜찮으시다면 hj@morehj.com 앞으로 메일을 한번 주시면 연락 드리고 싶습니다...
풀빛  | 2008/08/09 00:37
fly-by-wire님. 닉네임이 바껴서 다른 분인가 했어요. ^ ^ 그리고 선생님께서 '줄타고 나는' 님이라고 해서 '누구지?' 했구요.^ 6 ^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소통하려는 노력. 그것을 맘 깊이 담아두었던 학생. 그리고 그때 만나지 못했던 마음이 우연히 여기 난곡 블로그에서 절묘하게 만나게 된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 교육의 현실에 던지고 있는 의미가 무척 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두분이 그저 사적으로 나누시는 대화일 데, 감히 저희 블로그에서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락해주시면 여기 다신 댓글을 저희 난곡 블로그에 옮겨놓을께요. 두 분의 만남이 제 일처럼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 ^
  | 2008/08/09 00:49
풀빛님, 댓글 퍼다쓰셔도 좋습니다. ^^; ('줄타고 나는'은 블로그 이름이고 저는 그냥 morehj라고 씁니다 흐흐...) 하긴, 생각해보니 제가 블로그에 쓴 글은 우리 교육현실이 항상 겪게 되는 오래된 풍경이구나 싶기도 하네요...
함고생  | 2008/08/11 01:08
차용택쌤께서 해주신 이야기 오마이뉴스에선 여러분들도 기자가 될수있다. 거기서 제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엇다. 이런말씀을 해주셔서 여기 들어와서 쌤 이름 검색했더니.. 쌤께서 간간이 이야기해주셨던 강남 .. 학교 ..ㅋㅋ우와 저도 글을 읽고 짠 하게 뭔가가...
  | 2008/08/20 00:52
저 개인적으로는 비강남권 초등학교, 강남권 중/고등학교를 다녀 경계인, 회색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어떻게 말씀해주셨을런지 궁금합니다.
차용택  | 2008/08/11 09:56
윤현중? 미안한데 이름이 잘 기억 나지 않아. 나쁜 내 기억력을 탓해야지. 회송이는 기억 이 나. 날 따랐다기 보다 내 말에 대꾸를 잘 했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까 말했듯이 초기 언남 생활이 힘이 들긴 했어. 그런데 그건 4년 반 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던 내 탓이 컸을거야. 사진반을 중심으로 언남 최초로 전시회라는 걸 가졌고, 나중에 언남 축제로 발전시켜 가면서 아이들과 많은 교감이 이뤄졌고 아이들과의 관계는 즐거운 관계가 됐었어.
현중이 블로그에 가서 태그 달아놓은 걸 봤어. 글들을 다 읽어 본 건 아니지만 태그를 보고도 무척이나 건강하게-몸과 마음이- 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어. 흐뭇했어.
내가 있는 곳은 경남 함양이야. 지리산 자락이지. 식구들이나 친구들과 놀러와도 돼. 2층에 방 두 개는 늘 비워두니까.
언남 출신들에게는 숙박비 공짜! ^_^
  | 2008/08/20 00:52
선생님, 늦었지만 메일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idisnot  | 2008/10/19 17:14
두 분의 훈훈한 만남 축하드립니다.
라이방  | 2008/11/09 07:01
역시 진심이 담긴 소통에는 뭉클함이 있습니다.
언남 출신인 ^^  | 2008/12/13 06:59
안녕하세요
우연히 블로그에 오게 되었는데 차용택 선생님과 언남고 선배님까지 만나뵙게 되네요. 인터넷이란 게 정말 신기하네요. ^^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전 94~96년도에 언남에 다녔었구 차용택 선생님께 국어를 배웠었어요. 복직하셨다는 건 지금 처음 알게 됐네요 ^^; 그 당시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른(?) 느낌 갖고 계신 선생님 뵈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마치 영화 속 수업 같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뭔가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은, 보통의 선생님과의 관계는 딱딱한 벽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선생님과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쾌변이야기도 해주시고..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싶고 얘기도 많이 하고 싶었지만, 특별히 그럴 계기도, 용기도 없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졸업한지 1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차용택 선생님이 생각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담임 선생님보다도 더 생각이 난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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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에 미사가 시작된대서 마음이 급했다.
30분은 족히 늦겠구나 하고서 부랴부랴 나간 시청광장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다행히 미사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

딱 20년전에 들었을 때는 왜 사제들이 정치에 관여하는가, 세상이 더럽고 힘들더라도 종교만큼은 성전 안에서 위로와 안식의 말을 해주어야지 왜 속세에 개입하려 하는가 하는 반감만 들었다. (물론 그때는 청와대의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으니까) 그런 반감은 어느 말쑥한 신부가 여자 대학생과 함께 판문점을 넘는 장면이 TV에서 나왔을 때 '빨갱이'라는 단어를 그들 위에 쉽게 덧씌우는 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 신문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천주교의 정식인가단체가 아니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사에서 인터뷰했던 천주교 관계자는 사제단이 천주교의 공식조직이 아니라며 사제단을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하고 싶어했던 건 아닐 것 같다. 그저 'fact'만 말했겠거니 싶다. 하지만 그 신문은 그러한 fact에 대한 언급에 불과한 인터뷰를 이용하여 그들이 그때까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그러하였듯 사제들을 빨갱이, 좌익분자로 몰아가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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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할머니 제사 때문에 사당동 집에 갔다가 아버지한테 '데모하는 데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부모님과의 정치적 견해차에서 오는 불화는 이미 이력이 오래된 것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요 근래 집회에 더 자주 나갔지만 오늘 나간 시국미사에서는 느껴지는 바가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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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 부모가 '빨갱이'들로 믿고 있을 저 신부들이 집전하는 미사에, 중년... 초로... 내 부모 또래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보였다. 과연 제대 위의 '빨갱이' 신부들을 믿고 이 자리에 나온 그들의 신념은 내 부모의 신념과 어떻게 다른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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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시종일관 신앙과, 유머와, 의지로 진행되었다. (봉헌성가를 '헌법 제1조'로 고른 센스에는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제단은 결코 투쟁이나 대결을 주문하지 않았다.
50일 넘게 촛불시위를 하면서도 절대 응답하지 않는 정부에 대해 분노했던 마음, 그래서 이렇게 해서 달라지는 게 무어냐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물리력을 사용했던 우리들의 조급함... 그러면서 서서히 벌어져만 갔던 시민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반목과 분열의 생채기들... 아무도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우리가 고립되어 이대로 스러지는 것이 아니냐고 무의식 중에 느꼈던 외로움과 불안함...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사제단은 '위로하고 보듬어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이야기했다.

쇠고기니, SRM이니, 재협상이니 하는 것들, 그런 것보다도 우리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러한 '영혼과 신념의 증원군'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고, 우리가 옳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우리의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드려줄... 그러면서도 '우리가 50일 동안 촛불 드는 동안 누구는 산 위에서 촛불구경만 했대요~' 라며 유머있게 위정자를 조롱할 줄 아는 여유...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그런 것들의 보급이 아니었을까.

...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위로였다.

더이상 광화문 사거리를 뚫지 못해도, 청와대와 반대방향으로 거리를 행진해도 난 정말 힘이 펄펄 났다. 앞으로 50일은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우리가 든 촛불은 빛이고,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2008/06/30 23:56 2008/06/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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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  | 2008/07/02 16:09
무엇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글입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힘내십시요..
촛불  | 2008/07/02 16:47
님의 좋은 글이 현장에 있지 않았어도 그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줍니다...감사합니다. 신부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비밀방문자  | 2008/07/02 16:55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2008/07/02 18:49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가슴에 무엇인가 쏟구쳐 나오는...
참고 인내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심성이 착한 우리 대다수의 국민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가슴에 되새겨봅니다.
그리고 낮고 작지만 그 빛이 결코 작거나 꺼지지 않을것이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통해 더욱
느끼게 됩니다.
서울이 아니지만 비록 지방에 사는 여기 분들도 끝까지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그리고 천천히 국민이 주인되는 그 날까지 한걸음씩 걸어갈 것입니다.
마니피캇  | 2008/07/05 09:48
좋은 나눔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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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불리한 일을 겪을까봐 일부러 블로그에서 정치적인 얘기는 쓰지 않으려 했다.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정치적 의견을 적었다가 개떼같은 기자들로부터 스토킹당하고 신문 사설에서까지 '미친 소리'를 듣고 중고생들의 시위에 배후세력으로 낙인 찍히는 기상천외한 경험을 겪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괜히 책잡힐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있고 싶었던 거다, 요즘 같은 수상한 시절에.

내가 취직한지 4년이 좀 넘었다.

그간 승진도 했고, 가정도 꾸렸고, 성격도 좋아지고(??), 취미생활도 누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것들의 원인으로는 내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외풍에 크게 시달리지 않는 소위 '공기업'에 다닌다는 덕을 많이 봤던 것 같다.

하지만 공기업 개혁이라는 흐름은 나 역시도 비껴나가질 않는 것이어서 요 며칠새에는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으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고비가 아예 없겠어요?"

라던 팀장님의 말씀처럼, 좀 넓고 여유롭게 보고자 하는데, 원체 회사에 대한 기대가 컸던데다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내가 속한 회사의 외피에서 왔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라 지금의 불안함과 흔들림이 다시금 나의 나쁜 습성들(주위를 돌보지 않고 내 생각만 한다거나, 대책없이 걱정만 한다거나 하는...)을 내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불러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가까이는 내 옆에 함께 하는 집사람의 존재이고 크게는 광화문을 비춘 수많은 촛불들의 존재이다.

"여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먹여살릴께, 나한테 앵겨!" 라는, 구김살 없고 당찬 집사람의 응원에서 "그래, 이것보다 더한 걸 겪은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못할게 뭐 있냐" 싶은 강단이 생겨나고 이래서 부부란 것이 서로를 믿고 기대는 '동반자'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편, 촛불을 들고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면서도 그 자리를 한바탕 축제의 마당으로 승화시키는, 지극히 세련된 정치적 감각을 지닌 10대들을 보면서 온갖 절망적인 것들이 터져나온 상자 밑바닥에서 '희망'을 발견했다는 판도라처럼 나 역시 주저앉아서는 안되겠다며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리게 된다. 우석훈의 말처럼 10대 소녀들에게는 다른 세대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10대 소년과 20대 청년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가부장적인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의 권력구조에 편입하려 하거나 사회구조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절망감으로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둘 중 하나의 길만을 강요받는 10대 소년들.

그조차도 없이 오로지 '살아야 한다'라는 강박 속에서 자신을 도서관과 기업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20대들.

10대 소녀들이 '정치적으로 발랄하다'는 건, 그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여서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20대가 아니라 10대이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우리사회가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문화이며, 생존 그 자체의 문제가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그들이 든 촛불의 의미를 폄하하고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얼마전에 최근 수능 기출문제를 살펴보니 법, 사회, 논리, 추론 등에 대한 문제들이 참 많이 보이더라. 대학입시 때문이건 뭐건간에 이러한 '시민으로서의 무기'들이 교육과정 속에서 체득된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고, 이것만으로도 조중동과 이명박은 미래의 시장, 미래의 세력들과 척을 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미래가 밝고 희망적이라면, 나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다.
2008/05/10 18:26 2008/05/1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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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 2009/08/04 16:52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2008/05/15 00:21
캄사 캄사 또 캄사 ^^;
구스타프  | 2008/05/30 21:27
조만간 시간내서 함 들르겠습니다. ^^;
  | 2008/06/04 13:07
집이건 회사건 언제든지 웰컴!입니다~
아첸 - 안지호  | 2008/06/18 00:40
저 역시 희망적이라 생각하여 현장에 종종 나간답니다...
먹고 사는는데 정신없는 30대인 제가 할 수 있는게 지금은 그거뿐이지만...
그래도 '정말'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소리를 높이곤 한답니다.
  | 2008/06/30 23:56
저도 자주 나가고 있습니다. 대체 국민 이기려 드는 대통령이 어디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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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일 한 번씩 산책하러 나가실 정도로 정정하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골절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나는 결혼식 사진을 찍으면서 妻 될 사람과 나란히 선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항상 고운 것 같던 그 얼굴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똑같은 자리의 물사마귀가 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잘한 주름들이 팽팽하던 어머니의 피부를 서서히 덮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 한 쪽이 서늘해옴을 느꼈다.

동생은 대학원까지 다 졸업하고 벌써 두 번째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버지는 "귤 상자를 나르다가 허리가 삐끗했다"라며 회사일에 치여 결혼 이틀 전에야 가까스로 일찍 들어온 아들의 손을 빌려 허리춤에 파스를 붙이시곤 한 손에는 안경다리를 잡은 채 다소 구부정한 모습으로 방을 건너가셨다.

모든 것이 다 '나이듦'의 허전한 모습들이다.

그 허전한 시간 속에서 우리 둘만이 오롯이 행복한 웃음을 띠고 이 시간이 영원하길 기원하며 한 장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놓는다.

......

시간은 흐르고 나는 절대 늙지 않을 것 같던 예전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모습처럼 서서히 힘을 잃고 쇠할 것이다.

사랑은 짧고 인생은 길다던 어느 광고의 말처럼, 나는 아직도 삶이란 agony일 뿐이라고 믿는다. 오로지 그 위에 띄엄띄엄 놓인 행복의 '점'들이 있을 뿐.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소소한 '점'들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다. 예전에는 '끝없는 괴로움과 슬픔의 수직선 위에 낱알처럼 떨어져 있는 행복의 점이라면, 삶이란 어차피 괴로움과 슬픔일 수밖에 없다'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수직선이 온통 괴로움과 슬픔으로 차있더라도 삶의 '가치'라는 것은 작은 행복의 점들 위에 있다'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변화는 많은 부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왔던 것 같다.

심각하고 우울한 얘기를 하는 그 순간에는 곰곰이 들어주다가, 집에 돌아가서는 "우리 귀여운 고민남, 늦게까지 고민하지 말고 잘 자요!"라고 문자를 보내어 그때까지의 고민을 피식- 웃으며 툴툴 털게도 되고,

어느 식당에서 사진촬영용으로 비치해놓은 벙거지를 잽싸게 쓰고 얍~ 하며 V포즈를 취할 정도로 엉뚱하면서도 자기의 할 일은 밤늦게라도 우직히 해내는 모습에서 삶이란 염세(厭世)와 무위(無爲)가 아닌, 낙관과 '살아냄'의 조합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난 이제까지 많은 것들을 너무 뾰족하게 대해왔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고,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고,
삶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렇게 뾰족했던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방어였을 수도 있고, 외로움이었을 수도 있으며,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 좋더라. (가끔 새침하게 삐치는 일은 있어도...)

여성스럽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하고... 그리고 영민하기도 하고 열심이기도 한 이 사람과 함께 나는 기꺼이 늙어가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사람과 같이 모든 일의 밝은 면을 보고, 내 안에 있는 긍정과 낙관의 힘을 믿어보려 한다.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삶'이란 본질적으로  비루하고 괴로운 것이겠지만, 같이 걸어가는 마음 맞는 친구가 하나 있다면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 친구와 가게 될 첫 여행지가 바로 대륙의 끝,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는 사실은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우연치고는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삶도 폭풍 속에서 희망을 찾는 그러한 여정이 되었으면 한다.
2007/12/13 02:50 2007/12/13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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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만이  | 2007/12/13 12:55
자연의 모든 것들은 늙고 쇠하기 전에 마음껏 자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때로는 외롭지만 대체로 당당하고 자유롭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 . ^^
이중원  | 2007/12/13 14:25
우와 결혼축하드립니다! 청첩장 꼭 보내주세요!
현만이  | 2008/01/02 18:09
동생은 대학원까지 다 졸업하고 벌써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그게 왜 나이듦의 허전한 모습이냐? 아리송송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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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실까??!!
.
.
.
.
. . . 라고 하지만 난 이미 술고래 수준 ㅡ_ㅡ;;

고등학교 때는 술이라는 걸 무척 경멸했다.

반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날라리 애들이 툭하면 '술~ 술~' 타령하는 것도 보기 좋아보이지 않았고, 별로 실력 없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 영어선생님의 수업이 오전에 있을 때 그 선생님이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들어와 "야, 오늘 자습해~" 하고 교탁에서 눈 감고 콧바람을 씩씩 내뿜으며 혼자 숨을 고르는 모습도 싫었다. (공교육 교사에 대하여 내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다 이 선생님 때문에 생긴 것 같다)

그렇게 술 한 방울 입에 대본 적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오히려 술에 대한 반감만 가득 가졌던 채로.

그런 상태로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는데, 엄청 큰 음식점에서 열렸던 그 희한한 분위기는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내게 진짜 웃긴(복잡한 의미...^^) 경험이었다. 학생회 사람들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있던 선배들이 '술~ 술~' 고함을 쳐대는 걸 보고 희한하다는 생각을 넘어 일말의 불안감까지 갖게 되었는데...

.... 그 날처럼 술을 퍼마셔 본 적은 지금까지도 없는 것 같다. 대충 생각해봐도 혼자서 소주 5~6병은 족히 마셨으니까.

소주라는 걸 그때 처음 먹었는데 처음에는 과학실에서 맡던 알콜냄새가 나서 역하더니 이걸 점점 먹다보니 신경, 이성, 인지체계 모든 게 마비가 되더라. 그래서 술을 마실수록 내가 현재 취했다는 생각이 안 들고, 또 술의 알콜냄새도 사라져 술을 물처럼 들이붓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은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더구나 그때는 참이슬, 처음처럼 뭐 이런 저도수 소주가 있는 게 아니라 오리지날 진로 소주가 세상을 평정하던 시기였으니까.

덕분에 그날은 신촌역에서 사당역까지 지하철 2호선을 반바퀴 돌아오면서 거의 모든 역에 내려 휴지통을 붙잡고 겍겍 댔다. 사당역에 내려서도 도저히 집에 갈 힘이 없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부지를 불러서 '살려주세염...ㅠㅠ' 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사당역으로 마중 나온 아버지는 참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ㅡ_ㅡ;;

"업어주세..."

"업긴 뭘 업어. 빨리 일어나서 따라왓!"


사당역에서 우리집까지, 매일 걷는 그 길이 그렇게 휭휭 돌아보이고 멀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 아무튼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술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갖는 자리려니, 하면서 마시는 정도였는데, 이런 생각이 확 바뀐 것은 회사 들어와서 지방생활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아무도 없는 창원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 돌아와서는 혼자 맥주캔을 까서 홀짝홀짝 마시면서부터 술이 주는 알딸딸한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 거다.

남이 강권해서 마시는 게 아니라,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자신이 즐기며 마시는 술.
버거운 세상사와 고민을 '흥~!' 하면서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는 술.
괜한 수다와 까불거림이 아닌, 자신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고 차분해질 수 있는 술.
알싸한 알콜기운과 함께 맛난 요리를 찾게 하는 술...

본사로 복귀한 이후로는 공사의 소문난 주당이신 우리 본부장님과 팀장님 덕분에 이런 술 좋아하는 취향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제 폭탄주 스트레이트 4~5잔은 너끈한 정도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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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까지는 조용한 바 같은 곳에서 차분히 마실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왁자지껄한 술자리도 나름의 매력이 있고 재미있긴 하지만, 괜히 술 먹고 허풍을 떤다거나 주사(酒邪)를 부리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알콜과 조용히 교감하는(;;;) 내향적인 술자리가 좋다. (실제로 알콜중독자 중에는 내향적인 사람이 많다는데,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술은 따로 없지만, 굳이 마시겠다면 칵테일류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향적인 술마시기'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칵테일만큼 적당한 술이 또 있을까? 와인은 아직까지는 너무 어려운 것 같고...

(하지만 요새 부는 와인열풍에 대해서는 반감이 심하다. 한국에서 골프가 그러한 것처럼 와인 역시 '고급취향'의 한 트렌드 또는 아이콘인 거 같아서 말이다. 와인문화가 소위 '주류언론'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나의 의심은 더욱 강화된다. 와인이 다양한 취향/취미 중의 하나로 건전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 거품이 빠지는 몇년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술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술이 아닌 사람인 것 같다. 정겨운 사람들, 정겨워지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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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서울의 맛난 술집을 소개한 책을 산 이유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술 그 자체에 대한 탐미(耽美)라기보다는 술자리가 주는 '알딸딸함과 부드러움'의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좀더 잘 취해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좀더 즐겁게 취해볼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작년 국정감사 준비로 너무 힘들 때, "술 한 잔 사주십쇼" 라던 내 말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야, 야근은 무슨 야근이냐. 회 한 접시에 소주나 한 잔 하러 가자!"라며 술을 사주던 우리 상사에 대한 신뢰감이나,

가볍게 마시려던 와인 한 잔에 이제까지 성격 털털한 것으로만 알았던 아가씨의 발그레해진 볼에서 이제까지는 모르던 여성스러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나,

모두가 술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모습들이 아닐까 싶다.
2007/03/17 13:33 2007/03/1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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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책없이 바쁜 하루였다.

6시가 되자마자 기운이 다 빠져 털썩- 자리에 앉아서 또다시 야근준비를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짐 싸들고 퇴근해버렸다.

만들고 있는 비행기의 디테일업 금속부품을 자작해볼까 하고 을지로를 돌아다니다가
생각했던 가격보다 제작비가 훨씬 비싸게 먹힌다는 걸 알고
그냥 포기한 채 청계천 공구상가에 가서 0.8mm 핀바이스 드릴을 20개나 샀다.
드릴 하나에 6백원이니 12,000원을 쓴 셈.

* 모형인들을 위한 고백 : MiG-27K의 Chaff / Flare Dispenser 몰드를 포토에치로 만들어볼까 했으나, 코딱지만한 금속판 4개 만드는 데 30만원 이상 줘야 한대서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나왔음.

저녁으로 청계천 뒷골목 식당에서 혼자서 7천원짜리 갈비탕을 느긋하게 먹고
어슬렁어슬렁 충무로쪽으로 나갔다.
역시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이번에 처음 안 건데
을지로 3가에서 충무로 나가는 쪽에 인현동이 있더라.
인쇄골목으로 유명한 동네라지만
우리가족에게는 우리 큰고모가 예전에 살던 동네였다는 의미가 크다.
큰고모가 겪어낸 지난 風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늦은 저녁, 오래된 서울의 뒷골목은 스산하고 적적했다.

그렇게 충무로로 빠져나와 대한극장에 가서 '일루셔니스트' 표 한 장을 샀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끼리 한참을 떠들어대던 매표소의 두 아가씨는
내가 뻘쭘하게 '일루셔니스트 여덟시 반꺼 표 한 장이요' 하고 부르자
그제서야 '네~' 하며 표를 내준다.
뒤돌아서는 내 뒤로 두 아가씨가 다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양복입은 남자가 혼자 표 한 장을 사는 게 이상해보였던 걸까.
괜히 멋쩍기도 했지만, 뭐.

분명히 통로쪽 좌석을 달라고 했는데 통로쪽 좌석이 안 보인다.
차근차근히 번호를 따져보니 내 자리 K16번에는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커플女가 앉아있다.
불 환한 영화관 안에서 예고편 시작하기 전부터 지들끼리 좋다고
남자친구랑 엉겨붙어있는데
그걸 보고 괜히 뿔이 나서
'그 자리 맞으세요?' 라는 소리를 조금 까칠하게 해봤다.
내 눈치 살피며 한칸씩 옆자리로 옮기는 그 커플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한번 세워주고 싶었지만
남자놈이 싸움을 잘하게 생겨서... (나, 원래 비굴 빼면 시체다)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원래 에드워드 노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제 이놈도 초기의 샌님 같은 이미지를 벗고 점점 '성장'하는 것 같아 보기 좋다.
가녀리고 졸린듯한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눈빛과 분위기가 그 목소리마저 묘한 역설로 만들어낸다.
에드워드 노튼 원톱이면서도 투톱을 내세웠던 '프레스티지'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전이 거듭되면서 어둡고 우울했던 '프레스티지'도 좋았지만
이제까지의 어두운 분위기를 마지막에 유쾌한 반전으로 뒤집는
'일루셔니스트'도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영화를 한 편 보고 또 7천원을 소비하고 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 쓴 돈은 12,000 + 7,000 + 7,000 = 26,000원.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써버린 듯 하다.

이렇게 터벅터벅 집에 오니
아버지가 일요일 저녁에 친척집 돌잔치 가자고 하신다.
큰고모 손녀(나한테는 조카)가 돌이 된 거다. (벌써!)
일요일 저녁에는 좀 쉬고 싶어 안 가겠다고 했더니
안가더라도 10만원 정도 내라고 하신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그런 좋은 자리 있으면 돈도 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난 오늘 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만에 26,000원도 거침없이 쓰고 왔는데,
그런데도 갑자기 '10만원'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콱 막혀왔다.
어차피 나중에 나한테도 다 돌아올 돈이라고는 하지만
왜 자꾸 기꺼운 마음으로 돈을 내지 못할까.

내가 회사 다니며 적당한 정도의 돈도 벌고
이제는 부모로서 아들에게 돈도 받아 써보고 싶기도 하시고
그런 건 알겠지만
난 어지간해서는 그런쪽 경비를 최소한 줄이면서
나를 위해 돈을 쓰고 싶은데
갑자기 그 '10만원'이 돈 10만원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30-4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짊어지게 될
'큰놈(맏이)의 무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콱 막혀왔던 것 같다.

혼자서 청계천, 을지로를 쭐래쭐래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다고 휙~ 극장에 가서 영화 보고...
난 이런 생활이 너무 좋은데,
앞으로 장가 가고 애를 낳고 하면 이런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걸까.

영화 '세븐'에 나오는 모건 프리먼처럼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솔직히 아이도 갖고 싶지 않은데...

올해 장가 가기로 마음 먹은 나로서는
장가듦과 동시에 찾아올
이런저런 무게들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
이기적인 생각인 거 맞기는 한데
'너무' 이기적인 생각은 아닌 거지, 응?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맏이들이라면
당연히 느낄만한 그러한 버거움 아닐까.

난 그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함 없이
평범하고 합리적인 시민사회의 일원이고 싶을 뿐이다.

돈 아까워서...라기에는
돈 10만원이 던져준 고민이 너무 컸다.

2007/03/09 00:28 2007/03/0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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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 2007/03/12 21:25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2007/03/12 19:47
지독한 독신주의자는 아닌데요... 그저, '외로움 견딜 자신이 있으면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도지요. 어차피 결혼한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평생 '자기 편'이 생긴다는 점에서는 든든할 것 같습니다. 외모, 경제력 등등... 사람마다 반려자를 고르는 관점이 다 다르겠지만 무엇보다도 항상 자기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짝을 만나는 게 제일 중요하겠죠.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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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훈. (일본이름 Akiyama Yoshihiro)

이미 이종격투기팬들 사이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는 대스타라고 하는데, 이종격투기라는 장르를 '대체 뭐 하자는 거냐...' 식으로 바라보던 나에게는 당연하게도(?)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요즘 자주 놀러가는 lezhin이라는 분의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된 그의 이력이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인정 받지 못한 재일교포들의 辛酸한 삶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을 짠하게 했다.

한국은 그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저 천재적인 재일교포 4세 유도선수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지금까지도 '내 혼은 한국인이다'를 외치며 한국에 대한 짝사랑을 계속 하고 있구나 싶었다.

추성훈이 맹목적으로 한국을 그리워하는 멘탈리티...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라는 굉장히 마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것일 수 있지만, 2002 월드컵이나 홍콩 누아르 영화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불러일으킨 반향을 생각해본다면 그런 감정의 '옳다 그르다' 여부를 떠나 '(그런 감정이 대중에게) 먹힌다'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스타들은, 랜스 암스트롱이나 추성훈처럼 내면의 상처가 하나씩 있으면서도 그런 핸디캡을 극복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그런 사람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몸매'도 좋다. *ㅡㅡ*

사이클링에 최적화된 랜스 암스트롱의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몸매도 좋고, 유도로 단련된 추성훈의 파워 넘치는 근육질 몸매도 좋다.

(서로 지향점이 다른 운동의, 서로 다른 체형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두 사람 사진 붙여놓고 운동을 하게 되면 동기부여가 확실할 듯...ㅡ_ㅡ;;)

아무튼 나도 이렇게 오늘부터 랜스 암스트롱과 함께 추성훈을 주목해 보기로 했다... :)
2007/01/13 23:04 2007/01/1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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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udoku  | 2007/01/15 17:20
...불순하세요~;;
  | 2007/01/16 00:31
부...불순한가요...? -_-;;;;
박수원  | 2007/01/16 12:25
추성훈.......예전에 그에 관한 지방방송의 방송이 있었죠......일본에서의 차별 때문에 한국 부산에 왔는데 결국 부산에서도 차별은 그대로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 아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할만 하지만 나름의 소신으로 여러 난관에 맞서서 싸우는 고독한 파이터라 생각합니다. 처음엔 부산에서 훈련하다 국가대표에서 탈락 일본가서 귀화해 버려서 무지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가 나에게 다른 가르침을 주내요......그리고 그 당시 내가 그를 진정한 한국인이라 생각을 했는지도......
  | 2007/01/19 09:52
KBS 일요스페셜에서 보여줬던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 이야기'의 자료화면이 바로 그거였군요. 대체 무엇이 저 젊은이에게 저렇게 강한 애국심(?)을 길러주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뽀~*  | 2007/01/19 06:34
사실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는 재일 한국인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일지도...
예전에 KBS에서 방영한 다큐를 보면서 많이 답답했더랬습니다.
일본에서는 재능 있는 유도선수인 그가 귀화해주기를 바랐고
한국에서는 재능 있는 유도선수인 그가 부담스럽기만 했으니...ㅡㅡ;
  | 2007/01/19 10:15
저도 많이 답답했는데... 한국사회가 아니라면 과연 저 청년을 어디서 받아줘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니, 그를 내친 한국사회의 텃세(정확히는 '학연'이겠죠)를 반성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우리'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우리들만의 우리'를 원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경계해야겠습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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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기도하러 갔다가 현수를 만났다.
주일학교 교사 회합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는데,
내가 그 시간에 성당에 기도하러 들어가던 길이 아니었다면
과연 현수를 만날 수 있었을까.

.......

주말에 성당에 나가지 않고
그저 퇴근길에 성당에 들러 혼자만의 기도를 하고 들어오는 나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信者'라고는 못할 것 같다.

어떨 때는 지독히도 유물론자 같은 얘기를 떠벌이면서도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제 발로 성당을 찾아가는 이 모순을 감내하면서
나는 레닌이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비판에
'그래, 난 지금 아편이 필요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과 타인의 몸과 마음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추스리고 마음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그러한 아편은 얼마든지 기꺼워해도 될 거 같으니까.

가끔은
내 삶의 궤적이
어떤 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가기는 싫었지만) 나가서 앉아있으면 편하고 익숙한
나의 종교적 내력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나에게 의식이 생겼을 때부터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아온
내 어머니의 로사리오 기도의 '효험'일 수도 있다.
(정화수 떠놓고 신령님께 비는 할머니들의 기도와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내 무난한 삶의 80%는 이 기도와 희생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그 틀의 크기와 미래가 무엇이든간에
나는 내 노력의 크기를 넘는 요행을 바라지는 않으려 한다.
설령 그게 잘못됐다고 하여 남을 탓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으려 한다.

그저 그 틀 안에서
모든 즐거움과 노여움을
속으로 사위어낼 수 있는 넉넉함과 강인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자 한다.

2006/11/24 22:52 2006/11/2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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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 2006/11/26 20:12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2006/11/26 14:11
당장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요새 웨이트트레이닝과 책에 빠져지내서...^^;;) 그리고 저는 남사초 - 대치중 - 언남고 - 연세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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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씨는 눈이 참 깊고 맑구나."

... 정신 없이 업무 대화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선배가 툭- 던진 말에,
회사에서 항상 그러하듯 농으로 받으려다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 위로 옅은 미소만을 띠어보였다.

저 말마저도 농으로 받아버린다면,
나는 정말 이 회사 안에서
나 자신 본래의 모습을 이해 받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거 같다는,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순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온 저 말이야말로
이제까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여 나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내가 사람들로부터 가장 듣고 싶고, 가장 기다려왔던 말이었구나 하며
가슴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느꼈던 것 같다.

항상 적당한 말과 적당한 웃음으로,
역설적으로 긴장해왔던 내 가슴이
이제서야 나의 내면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듯 하여
순간적으로 경계를 풀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이 핑그르- 돌았대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테다.

.........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나와
하늘을 문득 올려다보니
높은 가로수 위에 큰 감이 하나 달려있었다.

웬 감일까 하고 걸으면서도 시선을 박아두고 살펴보니
큰 감이 아니라 풍선이다.
누군가가 청계천에 놀러왔다가 놓쳤겠거니 피식 웃다가
옛날 우리집 마당에 있던 큰 감나무가 생각났다.

"왜 감 다 안 따요?"
"응, 까치 주려고... 새들도 먹게 몇 개 남겨두는 거야."

그 마당을 헌 자리에 마당 없는 큰 집을 지었지만
나는, 요새가 더 행복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 그보다는, 내가 요새 많이 힘든가보다.
2006/10/20 23:30 2006/10/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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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  | 2006/10/22 11:29
현중님의생각은 그야말로 "예쁘다.."라는 표현이 맞는듯, 느낌이 오는군요.
  | 2006/10/22 21:36
생긴 건 산적(?) 같은데 생각하는 게 가끔 센치해질 때가 있죠. 허허...^^
라이방  | 2008/11/09 17:34
작가적 소양이 물씬 묻어나는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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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동기 JP형의 결혼식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학교, 학과 선배라 그럴까.
회사 사람 말고도 낯익은 얼굴들이 꽤 보였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사람들하고 잘 어울려 다녔던 것 같은데,
군복무하고 방황(-_-?)하고 캐나다 갔다오고 하면서
슬슬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벌어진 어색함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웃음을 띤 채로 손을 들어도
쉬 메워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더라.

.... 사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겠지'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그게 아닌데.

저 사람들과도 가까이 지내고 싶고
내 마음도 보여주고, 상대의 마음도 보고 싶고...
사람끼리란 그렇게 지내야 함을 알고,
또 정말 그렇게 지내고 싶기도 한데
예의 그 예민함은 주저함이 되어
반가움의 인사를 입술 바로 앞에서 다시 목구멍으로 되넘기곤 한다.

어쩌다 어렵사리 인사를 나누어도
어디에 눈을 둬야 할 지 몰라 흔들리는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먹해하는 것은
'그래, 서로 못 본 척 할 것을...' 이라며 처음의 주저함을 다시 확인시켜줄 뿐이라 스산하다.

.......

적당한 선을 긋고 그 선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
그래서 어느 정도의 '적당한 관계'까지만을 허용하고
자신의 절대공간을 남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
전투적인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사(戰士)로서의 필수덕목일지도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둘러친 이 내향(內向)의 금은
스스로를 한계지워 목마르게 하기도 한다.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그 새로운 관계에 싫증이 나면
또다른 새로운 관계를 바라는 나는,

여전히 평화롭지 못하다.
여전히 부초(浮草)를 닮았다.

2006/06/11 23:05 2006/06/1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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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새에 해외토픽을 통해 많이 알려졌는데,
미국 오클라호마에 한 가족이 기르고 있는, 두 다리로 걷는 개란다.
이름은 '페이스'(Faith). (http://www.faiththedog.net/)

처음에는 '두 다리로 걷는다'라는 점이 신기해서 봤는데
곰곰히 볼 수록 뭔가를 더 깊게 생각하게 됐다.

'과연 나라면 저 개를 기를 수 있었을까...?'

아까 사무실에서 DH와 얘기하면서
우리들이라면 저렇게 앞다리가 없는 강아지를 기를 수 있을까 고민을 했더랬다.
(사실 저 개는 앞다리가 기형이어서 제거수술을 받은 뒤 두다리만으로 걷게 자란 거란다)
엊그제는 본부장님이 나와서 팀장님과 얘기하시다가
외국인들은 입양을 하더라도 기독교적인 사랑 때문에 장애아를 입양하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하다는 얘기를 하시는 걸 얼핏 들은 것도 생각났다.

......

TV나 라디오에서 24시간 내내 떠들고 다니는,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목마르게 찾아 헤매고 다니는 '사랑'의 모습이란,
사실 잘 꾸며진, 그래서 잘 팔리는 - 이상화된 추상적 '상품'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항상 '사랑'이란 것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마트에서 식품을 고르듯,
이미 완벽히 가공되어 통조림처럼 먹기 쉬운 형태의 '사랑'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려고만 한다.

실제로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분홍빛만도 아니고
오히려 항상 자신을 낮추고 굽히면서 상대를,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래서 실은 '굉장히 귀찮고 버거운 과정'에 더 가깝다는 게 옳겠다.

.........

만약 페이스가 우리들의 집에서 키워졌다면
우리는 정말 저 앞다리 없는 강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DH에게 시니컬하게 했던 말처럼
집 앞 공원에 대충 유기(遺棄)된 채,
기껏해야 유기견보호소에서 안락사 당하는 것으로
얼마 안 되는 현세에서의 삶을 마감했을 것 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페이스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나머지 두 다리로 서는 법을 가르친
미국 스트링헬로우씨 가족의 '사랑'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도 사람인데 왜 다리가 둘 뿐인 이상한 개의 모습에 저항감을 느끼지 못했으랴.
그리고 그들 역시 그 저항감과 좌절감에 최소한 한번쯤은 페이스를 버릴 생각도 들었을 거다.
(만약 그런 마음이 한번도 들지 않고 처음부터 가족구성원 모두가 페이스를
너무 사랑스럽게 생각했다면 그건 스스로를 낮춘 사랑이 아닌, 예외적인 경우이므로
존경심이 들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 스스로의 내면의 장애를 극복하고 그들이 페이스에게 보여주었을 사랑은
정말 '겸손과 과정'이라는 내 나름의 '사랑'의 정의에 꼭 들어맞는 것일테다.

처음에 단순히 '신기한 해외토픽' 정도로 읽었던 기사에서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2006/05/04 22:19 2006/05/0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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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원  | 2006/05/05 00:34
저두 이 기사를 보면서 느낀바가 큼니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기르던 개중에 사고로 한다리를 쓰지 못하던 녀석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참 이뻐하셨거든요......다리를 쓰지 못하고 볼품이 없었지만 늘 다른 녀석들 보다 더 이뻐 하셨던게 기억에 남습니다. 나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윤현중  | 2006/05/05 13:48
세상을 사랑하자구요...^^;;;
김도형  | 2006/05/05 02:38
안녕하세요. 처음 방문인사 드립니다. ^^
그나저나 음악도 아주 좋아하시는 듯하군요. 더욱 반갑습니다.
음.. 그리고 블로그가 참 맘에 듭니다. 역시 커스텀이 좋은... ^^ 기존에 있는건 조금은 딱딱해서...
윤현중  | 2006/05/05 13:49
도형님 블로그는 매일 가보는데 댓글을 처음 남겨서 모르셨나보군요. ^^;; 앞으로는 댓글도 자주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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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8일.

한국의 명절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피붙이의 정을 나누었을 큰삼촌에게는
30년전 홀로 호주로 건너갔을 때와 같을 홀로남겨짐이 남았고,

20년간의 고생 끝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막내숙모에게는
결혼 후 그를 믿고 호주로 건너올 수 있게 해주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사라졌다.

셋이서 엉겨붙어 까르르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던 세 아이들에게는
이제 행복하게 웃어도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결핍과 슬픔에 대해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 있는 내 아버지와 고모들에게는
가장 늦게 나왔으되, 가장 먼저 눈을 감은 막내동생에 대한 눈물과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으면서도 여전히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채
오늘도 건강히 식사를 하고 TV를 보는 늙은 아버지의
아무 것도 모르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후벼팔 것이다.

그리고 삼촌의 큰형수 - 우리 엄마에게는
시집 와서 종종 다투어 밉살스러웠을 막내도련님이었겠지만
병을 알게 된지 단 3개월만에 그렇게 빨리 스러진 막내도련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며칠전 병원에 입원한 친정어머니에 대한 어두운 마음에
시댁과 친정, 양쪽으로 마음을 쓰느라 힘든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2년전, 먼저 하늘로 가신 할머니는,
가장 늦게 왔어야 할 막내아들이 가장 먼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보고
기꺼워하셨을까.
아니면 생전에 할머니가 정말 슬퍼서 울 때의 그 모습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인상만을 쓰시면서
속으로 속으로... 꺽꺽 울음을 참으며 막내삼촌을 맞았을까.

삼촌... 이제 안 아퍼...?
2006/01/09 22:06 2006/01/0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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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7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내년 2006년이면, 흔히들 말하는 나이로 '서른'이라고 한단다.

난 항상 만(滿) 나이로 계산한다고,
아직 20대 안 지났다고 농담으로 말하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나이를 줄여서 무엇하랴.
한국식 나이로 세건, 만(滿) 나이로 세건,
올해는 내가 이십대를 떠나보내는 해이고,
내년은 내가 서른에 '진입'하는 해이다.

.........

1996년 3월 대학교 입학.
1997년 5월에 성인(만 20세)이 되고 그 해 12월에 2학년 2학기 마치고 휴학.
1998년 3월부터 6월까지 아파트 단지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고 7월에 훈련소 입영.
1998년 8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공익근무요원 생활.
2001년 3월에 3학년 1학기 복학.
2002년 6월 월드컵이 끝난 직후 캐나다로 도피성(?) 어학연수.
2003년 6월말 귀국하여 마지막 학기 복학, 그리고 취직...
2004년 2월 회사원 신분으로 대학교 무사 졸업.
2005년 2월 경남지사 발령 받아 창원으로 내려옴.
2006년 1월 경남지사를 떠나 서울 또는 기타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

대학교 입학으로 시작하여
회사생활에 발을 딛게 된 나의 이십대를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해놓은 거 없단 생각에 피식 웃음부터 나온다.

사시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요,
취업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요,
음주가무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뒤돌아서 눈 위에 남은 내 걸어온 발자국을 바라봄과 같이
이제와서 나의 지나온 이십대를 바라보니
참 억세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서늘하다.
주변에 이렇게 사는 사람을 봤다면
'너,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크게 다친다'라면서 혼을 내주었을텐데.
여태까지는 위태위태하면서도 굽이굽이마다 잘 버텨왔던 것 같다.

뭘 해야할지 몰라 항상 불안하던 시절,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란 걸 깨닫고 우왕좌왕하던 시절.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던 열여덟의 나는
'취직만 되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던 스무해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매일 묵주기도를 하던 엄마의 기도 탓이었는지
억세게 운빨이 좋아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도 그럭저럭 취직을 했으니 난 뭐라 할 말이 없다.

.........

물론, 내가 보낸 스무해의 삶이란 것이
이렇게 무엇을 이루었느냐 이루지 못했느냐라는
외적인 스펙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

몇년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썼던 글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나의 사고(思考)를 열어준 나의 이십대에 여전히 감사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굳이 그걸 미화하고 싶지 않은 건
언제까지고 그걸 '아름답다'라고 우려먹을 순 없기 때문이다.

'사고(思考)의 방법/방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기술(skill)에 불과한 것이어서
익히는 그 자체로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그걸 도구 삼아 무언가를 이루어 냄으로써 가치를 발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세번째 고개에서는
내가 두번째 고개에서 겪었던 우왕좌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늦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 가시적인 결과를 얻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

솔직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회사 안에서
내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이런 허튼 욕심을 가지는 것인지 의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보내게 될 나의 세번재 고개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여유가 있을 거라는 것,
무슨 일이 있든지간에 조금 넉넉하게 그 일을 맞을 수 있을 거라는 것,
그런 것들이다.

무슨 일을 계획하더라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폭발하고 싶다거나, 우울해하지 않으며,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여유'에 관한 믿음이 조금씩 생긴다.

이제는 사람들 속에서 하하 웃으며 돌아다는 내 모습이
어둡고 우울한 내 내면의 자아와는 다른, 거짓된 나라고 부정하지 않으련다.
적당히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적당히 푼수끼 있는,
사람들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 또한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련다.

한 몸 안에서 불안하게 동거하는 것 같던, 그래서
시끄러운 파열음을 내며 언제 찢어질까 조마조마했던 나의 서로 다른 두 모습도
이제는 여유있고 너그럽게 모두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만큼
나 자신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내가 되고 싶다.
여유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춘,
진정한 강자(强者)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 다짐을 굳게 하기 위해
새해의 일출을, 백두산에서 맞기로 했다.
2005/12/26 00:14 2005/12/26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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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s  | 2005/12/26 02:27
맑은 날 되기를..잘 다녀와~
WOO  | 2005/12/26 09:29
저 사진 너냐?? 완전 얼짱이자너~~ 언제 변한게냐? ㅎㅎ 백두산 잘다녀와라~
  | 2005/12/26 10:12
나 백일 때 사진이다 ㅡㅡ;;; 모진 세파에 시달려 이렇게 되었지,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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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추워서 청소도 안하고 이불 속에서만 지냈는데
정말 보다보다 못해서 어제 대청소를 했다.

싱크대에 박아둔 다 먹은 통조림 캔, 수저, 그릇... 다 닦아서 치우고
이불을 탈탈 털어 페브리즈를 한번 뿌리고
내 방말고 마루, 건넌방, 부엌까지 미친 듯이 쓸고 닦고 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룬 뒤 샤워를 했다.
샤워를 다 한 뒤에 또 (순서는 잘못됐지만) 솔에 락스 묻혀서
세면대와 양변기를 박박 닦고
걸레 3개를 빨래비누 묻혀서 벅벅 빨아댔다.

빨래판을 세워놓고 일어서서 세면대를 바라보니
다 빤 걸레를 짜는 내 표정이
입을 앙다문채 자못 결연하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거울 속의 내 표정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와서 대충 옷을 갈아입은채
방 걸레질을 하고 욕실에서 와이셔츠를 빨던
우리 엄마의 그 억척스러운 표정 아니던가...?

'엄마도 어쩔 수 없이 아줌마구나...' 하며 엄마가 청소할 동안 고아하게 책을 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나도 이렇게 '홀아비스러운' 모습으로 청소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예전에 엄마랑 TV를 같이 보다가
안성기랑 어떤 모델이 나오는 맥심CF를 봤는데,
그걸 보면서 '엄마, 나도 저렇게 우아하게 늙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가
피식 웃으며 '에그...늙어봐라...'라고 하는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엄마가
'그래, 저렇게 우아하게 늙는 모습이 멋있지'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ㅎㅎ

김이 뿌옇게 서린 욕실에서
한 손에 걸레를 들고 멀뚱하니 선 채로 거울을 보면서
자꾸 내가 예전부터 별로 닮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지난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아버지, 어머니랑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발가락 하나라도 닮은 게 '새끼'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2005/12/15 13:31 2005/12/1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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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 2005/12/15 16:37
이제 쭝 장가보내도 되겠네~
  | 2005/12/15 16:57
내가 원래 좀 머슴科야...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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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의 블로그에 갔다가
이런 사진을 발견했다.

설명을 보니 2005. 5. 4. 교보문고 안양점 오픈행사로 열린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었다는데...

인터뷰나 작품에서 풍기던 그 치열함 때문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김훈이래도
웃는 모습만큼은 참 사람좋게 찍혔다.

작품을 읽으면서 항상 보이지 않는 '한계' 같은 것을 느끼곤 하여
종내 아쉬운 공지영 역시도 저 사진 속에서는
넉넉한 아줌마의 모습이다.

작품이 그걸 쓴 이의 전부는 아닐테다.
작가를 만나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현실세계 속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책과 글자를 통해 작가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연히 찾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문자와 문장을 넘는, 작가의 오롯한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
2005/11/16 17:01 2005/11/1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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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서 고무장갑 끼고 락스 묻힌 솔로 신나게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아부지한테 전화가 왔다.

낮에 일이 있어 이미 통화를 길게 한 상태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 전화를 받아보니
수화기 저 편에서 얼큰하게 취하신 목소리가 들린다.

건치과 김원장 아저씨랑 신촌에서 좀 드셨단다.

서울날씨가 10도 이하로 뚝-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추운 날씨에 신촌에서 기분 좋게 술 드시고 입에서 허연 김을 내시면서
아들놈한테 전화를 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좀 가슴이 짠했다.

.... 실은 얼마전에
집을 내 이름 앞으로 돌렸다.

그걸 받아서 신났다기보다는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아버지의 퇴직금이 고스란히 들어간 '알토란' 같은 집인데
(이순자의 '알토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그 집을 아들한테 넘긴다는 게 아부지한테 얼마나 큰 상실감일까, 뭐 그런 생각.

그래서였나
아부지는 수화기 너머로 계속
'야, 이놈아...니, 니네 부모한테 잘해야 돼, 이놈아...'
이런 말을 두세번 반복하셨던 것 같다.

......

충남 연기군인가...
최근에 그곳의 부모를 찾는 자녀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었단다.
안부전화도 자주 하고...
'효(孝)도 돈 있는 곳에 난다' 라는 말도 돈다고 한다.
그런 말들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무장갑을 끼고 받은 전화 너머로 들리는
아부지의 얼큰한 목소리에 짠했던 내 마음이
정말 자식으로서 늙어가는 아비를 보는 순수한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이제 받을 것은 다 받아 챙긴 속된 자의 여유로운 측은지심이었는지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그냥 이런 그림들이 생각났다.
아부지...하면 항상 떠오르는 그림들.

서울 변두리 살 때,
집 뒤에 있던 개천 둑길을 따라
엄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빙긋이 웃는 표정으로 페달을 밟고 전철역까지 출근하던
풍경화 같은 모습.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시던 아부지가
어느 목요일 저녁, 일찍 들어오셔서 나와 내 동생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나가시려던 모습.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가 물으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항상 '엄마!' 소리를 할 정도로 아부지를 생각하지 않던 우리가 느낀 어색함과 달리
아부지는 그날 우리와 함께 산책을 나가시면서
우리가족 날적이 수첩에 엄마 앞으로
'남자들끼리만 데이트하러 가서 미안합니다'라고 적으며 또 빙긋이 웃으셨다.

나는 그때 그 구절을 보면서
아부지의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세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 아부지의 '서툴고 세련되지 못함'은 비단 문장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아부지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또하나의 장면.
국민학교 2학년 때였나... 수업 끝나고 신나게 집으로 달려왔는데
대문이 열려있어 이상하다 싶어 현관으로 들어서니
할머니가 펑펑 울고 계셨다.
할머니 손에 들린 건 몇개월전 리비아 건설현장으로 가신 아부지의 첫 편지였다.
한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할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이 어색해서
나는 등에 맨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채로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괜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던 것 같다.

......

일본의 어느 수필가였나.

늙은 어머니를 업고
그 가벼우심에 펑펑 울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 역시도 한달에 한 두번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눈에 띄게 늙어가는 아부지의 모습을 보고 괜히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가끔 집에서 가볍게 술을 드시면
그제서야 정치얘기를 화제로 삼아 나와 싸우시곤 하는데
논리적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음에도 나와 굳이 정치얘기를 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사실은 내가 정치얘기를 할 때 가장 날카롭고 말이 많아진다는 것,
그래서 아부지가 원하는 것은 사실
아부지와 나 사이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The Great Debate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똑똑하고(똑똑해보이고) 말 잘하는(말 잘하게 보이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싶어하시는 거라는 걸
나는 몇 년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설령 자기 자신이 아들에게 논리적으로 공박을 당하고 허물어져도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아들의 강력함을 보고 기꺼워하고 싶어하는 아비의 마음이라는 것은
갓 태어난 제 새끼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거미를 닮았다.

거미도...외로울까...?
2005/11/09 12:01 2005/11/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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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 2005/11/09 21:48
그래서 아버지 친구분들이 던지시는 "니놈이 애비보다 낫구나."라는 말을 아버지들은 기다리시는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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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글이지만
대학 초년생 시절에 끄적였던 낙서에
이렇게 적었던 게 생각난다.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죽음의 순간, 내 심장에 가해질 물리적인 고통, 그것 하나뿐이다.
그 외에는 죽음의 어떠한 면도 두렵지 않다.'

그 글을 썼던 시절의 나는
꽤 우울했던 것 같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 와 같은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그래, 지금 상황에서 죽어도 잃을 게 없어... 라는 찌질함이 느껴진다.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심장에 가해질 물리적 고통을 넘어
죽음의 그 다른 어떤 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빛이 넓어질수록 그림자가 길어지듯,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커진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과
앞으로 내가 누리고 싶은 꿈들 또한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안한 것은
내가 가진 '삶에의 의지'가 굉장히 굳건한 게 아니라는 거다.

내 자신감의 많은 부분은 솔직히
내가 가진 경제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렇게 경제력 위에 올라탄 '삶에의 의지'는
시장바닥에서 이를 박박 갈며 하루하루를 전투적으로 살아내는 젊은 야채상인의 '투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다고 생각한다.
(훈련소에서 만났던 그 가락동 야채상 청년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종교적인 無所有 정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인 '삶에의 의지'란,
평화, 여유, 행복과 같은 소극적 낱말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콜로세움의 검투사들과도 같은 서슬퍼런 鬪志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 같다.

정말 나는
... 살고 싶은 걸까, 죽어도 상관 없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간에
나는 투지를 기르고 싶다...
2005/11/07 11:52 2005/11/07 11:52
http://morehj.com/blog/trackback/469
woo  | 2005/11/08 17:24
이자식 밑의 "악몽"과 더불어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일을 칠것만 같은 기세군~ 힘내3!! 서울올라가야할 이유가 혹시 문근영의 성대 수시 지원과 관련있는건 아니겠지?^^
  | 2005/11/08 21:07
히힛, 근영이도 보고 싶고 광화문도 보고 싶고... 비행기도 만들고 싶거든!!! ^.^
소나무  | 2005/11/09 21:49
근영이 브로마이드 보내주랴? 그리고 뱅기는 걍 창원에서 만들고... 좀 더 살아봐바!!!
  | 2005/11/09 21:57
.....↑ 죽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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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 선생님께 드리는 답변
http://happyvil2.hani.co.kr/board/board_view.php?board_id=board_3&uid=831&so=&sk=&cline=

김형경
등록일  2005-10-13
조회  1030

jen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자가 쓴 비방의 글을 읽고 충격이 크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선생님께서 해석하신 대로 아이의 분노는 선생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대상을 향한 것입니다. 내 편이고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선생님이 분노의 근원인 부모와 한 통속이었구나 하는 아이 수준의 판단이 선생님에게 분노를 전이시키게 된 원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블로그가 일기장 역할을 하는가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대응 방법들에 대한 생각이 많으신 듯한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래에 덧붙이는 글을 읽고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jen 선생님의 경험과 유사한 사례를 소재로 에세이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참고 삼아 덧붙이자면, 아이가 분노를 표현하더라도(울고 떼쓰고 땡깡부리기 같은) 일관되게, 인내심을 가지고, 관대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엄마가 아이를 보살피는 보편적이고 올바른 방식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내면의 불안감을 이겨내고, 사랑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정서적으로 성장하는 거지요. 선생님께서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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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일기장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일찍 결혼한 친구는 이미 대학생이 된 아들이 있고, 늦게 결혼하여 늦게 아이를 낳은 친구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는 딸을 두고 있는데, 친구들은 두 부류였다. 아이들의 일기장 같은 것은 모르는 척 그냥 내버려둔다는 쪽과, 그래도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몰래 체크한다는 쪽.

그들 중 올해 중학교 들어간 딸을 둔 친구가 있었다. 그 딸은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로 접어드는지 전에 없이 방에 들어가면 방문을 잠글 뿐 아니라 외출할 때는 책상 서랍을 자물쇠로 잠가 놓곤 했다. 친구는 ‘교양 있는 엄마로서’ 딸의 책상 서랍 같은 것을 뒤져볼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다. 사춘기 딸이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사생활 영역을 갖기 시작했구나 생각하면서 그저 모르는 척해주는 게 상책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딸 아이의 실수인지, 의도적 행위인지 책상 서랍에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은 날이 있었다.

교양 있는 엄마로서 그것조차 못 본 척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열린 서랍 앞에서 호기심이 교양을 이기고 말았다. 딸의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든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두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장 넘기지 못해 친구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상태로 딸의 일기장을 대충 훑어봤는데, 그 공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에 대한 욕이 가득 적혀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모든 것을 원위치로 돌려 놓고, 아무 일 없는 듯 집안 일을 계속했지만 손이 떨려 무엇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고 했다. 딸 아이가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오면 호되게 야단쳐야지 싶다가도 그래선 안되지 하는 마음이 들고, 나름대로 딸에게 잘 대해주는 좋은 엄마라고 자부했는데 어디서 어긋난 걸까 되새겨보기도 하면서……. 오후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인 딸의 내면에 그토록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일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뒤죽박죽인 채로 저녁이 되었을 때 친구는 상 차리기를 포기하고 외출했다고 했다.

“그 길로 먼저 애들 키워낸 선배를 찾아가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 선배가 웃으면서, 애들 키울 때 그런 일은 예사라면서,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거야. 생각해봐, 우리도 사춘기 때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잖아.”

친구는 그 일을 절대 모르는 척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아무 일 없는 듯 딸을 대했지만, 실은 일주일 동안이나 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기간 동안 아주 많은 것을 되새겨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게 많더라. 걔 태어났을 때 내가 어리기도 하고 뭘 모르기도 했어. 아기 때 걔 고집 꺾는다고 걔랑 자존심 싸움 같은 걸 했던 것 같아. 그때 애가 고집부리고 엄마 이겨 먹으려 할 때 다 받아주고 포용해야 했는데, 너무 어려서 그걸 몰랐어.”

친구는 자신이 잘못한 사실 또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딸 아이 밑으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무래도 딸보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더 만족하고 행복해 했던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동생 보는 아이한테 시샘하는 마음이 생겼을 텐데, 게다가 딸이라고 차별감까지 느끼게 했으니……. 친구는 딸의 마음 속에 어떤 서운함이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면 아마도 거기서부터 잘못되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더구나 딸 키우면서 겪은 시행착오을 바탕으로 아들은 한결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키워냈으니 아들은 여러 면에서 딸보다 편안한 유년기를 보냈을 거라는 거였다. 그런 남동생을 보면서 딸은 아마도 계속해서 어떤 차별감을 느끼게 되었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 어렸을 적 일기장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5,6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는 부모가 이혼한 후 처음으로 내가 하숙집에 맡겨진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삶의 터전이 와해된 상태에 처한 아이는 아마도 심리적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분노와 우울과 불안 같은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뒤섞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혼돈 상태로 지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마음들을 하소연하거나 투정할 대상도 없이, 내면의 모든 것들을 억압한 상태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초등학교 친구는 당시의 내가 말없이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었다고 회상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거의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았을 내면을 그나마 조절하고 해소시켜주는 유일한 통로가 일기였던 것 같다. 물론 일기는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의 일부였고,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일기장을 검사했다. 나는 그 일기 속에 내면의 모든 것을 쏟아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이 엄마에게 조잘거릴 그 날 일과를 일기에 썼고, 친구들과 있었던 일이나 읽은 책에 대해서도 일기에 기록했다. 무엇보다 내면의 분노와 불안과 우울까지도 거름 장치 없이 일기장에 토로했을 것이다.

아니, 쉽고 솔직하게 말하면 내 일기장에는 부모와 선생님에 대한 욕이 7, 8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욕은 지금도 입에 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험악한 언어들이었고, 도저히 아이가 사용할 만한 내용의 욕이 아니었고, 대체 어디서 그 욕들을 배웠을까 의심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자의식이나 자각 없이 욕으로 점철된 일기를 쓰곤 했고 일기장은 세 권, 네 권으로 늘어나 내 일기장 묶음이 반에서 가장 투터웠던 걸로 기억된다.

지금도 그 일기장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그토록 욕으로 일관된 일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대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담임 선생님께서 그 일기장에 꼬박꼬박 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 받은 일기장을 복도 난간에 표본처럼 전시해 두기도 했다. 한 번은 연세 많으신 교감 선생님이 그 일기장을 들춰 보다가 “아니, 뭐 이런 학생이 다 있어?”라고 말씀하시며 놀라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복도 청소를 하다가 들은 일도 있다.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교감 선생님보다는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셨던 것 같다.

엄마에 대한 욕으로 점철된 딸의 일기장을 보고 놀란 친구에게 나는 내 어렸을 적 일기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때는 일기장에 욕을 쓰는 그 행위만이 유일하게 내가 심리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바로 그 일기장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조용하고 온순한 학생의 외양으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내가 적었던 그 모든 욕들이 실은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분노’여서,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그 욕들은 “제발 나를 좀 사랑하고 보살펴줘요”라는 외침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시절의 일기장을 생각해 보다가, 내가 소설가가 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시다면 그때의 담임 선생님 아닐까 싶었던 적이 있다. 만약 그때 그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에 대해, 일기 쓰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야단을 치셨다면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던 그때의 나는 그 후 단 한 줄도 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쏟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반항된 행동이나 폭력으로 그 억압들을 분출했을지도 모른다. 험악한 욕으로 점철된 일기장을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의 용인과 격려 속에서 나는 아마도 생각과 감정을 저어함 없이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을 훈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 그 선생님이 가슴 저리도록 고맙게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이 명제가 얼마나 진실에 부합되는지 알 수 없으나 ‘사실’에는 어느 정도 접근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기억할 만한 일기 문학들을 떠올려보면 저자가 행복하고 충만한 시기에 쓴 것보다는 억압되고 고통스럽고 소외된 상태에서 쓴 것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도 그렇고,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도 그렇고, 윌리엄 소로가 쓴 ‘소로의 일기’도 그러하다.

몇 해 전 한 지방 도시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그들의 비인간적인 주거지에서 화재를 당해 탈출도 못한 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 화재 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과 근무 조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때 사망한 성매매 여성이 꼬박꼬박 써내려간 일기장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일기장의 글씨체는 마치 사춘기 소녀들의 그것처럼 도형적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형태였고 내용은 기도문의 간곡함을 담고 있었다.

그 일기장 사진을 오래 들여다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일기장을 보고 있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는 정서적 반응이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물론 도형적 글씨체나 간구하는 듯한 문장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뒤편에 있는 것, 일기를 쓰면서 머뭇거리거나, 가슴을 움켜쥐거나, 맥없이 풀리기도 했을 어떤 여성의 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모욕적이거나 파괴적이거나 절망적이었을 상황 앞에서 오직 일기 쓰기밖에 할 수 없는 한 여성의 얼굴도 그려질 듯 떠올랐다.

그 일기는 내 눈에, 그 여성이 유일하게 숨쉴 수 있는 심리적 산소 마스크처럼 보였다. 오래 전 한 초등학생을 심리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배려해 주신 그 선생님 역시 이런 마음으로 그 일기장을 보고 계셨겠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지금도 교감 선생님으로 교직에 계신다고 한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이 전화해서 그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선생님이 의외로 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더라고 하면서, 한 번 찾아뵈면 반가워하실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혼자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아마도 나보다는 나의 일기장을, 일기장 속의 욕들을 더 명확히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직 생활 기간 중에 그토록 살벌한 욕을, 공책 서너 권이 되도록 적어나간 학생을 그 후 몇 명이나 만나셨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 찾아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지만 번다한 일상과 게으름 때문에 언제가 될지 막연하기만 하다.
2005/10/20 10:37 2005/10/2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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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 2005/10/20 22:54
이 글 참 마음에 든다...
  | 2005/10/20 23:14
가급적 글퍼오기는 자제하려고 하는데, 이 글은 나도 참 마음에 들어서...^^;
소나무  | 2005/10/25 13:08
자제하지만 자주 가져가는지라... 이 글 역시...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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