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9/10/30 15:51
헌법재판소 결정이 내려지던 2009년 10월 29일 오후 2시. (이곳 시간으로는 밤 10시)
Daum에 뜨는 속보를 보다가 결정문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오던 일련의 속보들이 모두 '무효', '무효'라길래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하지만 1시간쯤 뒤에 다시 인터넷을 켜보니 식스센스 버금가는 반전. 절차는 모두 위법이지만 무효확인청구는 기각한댄다. 살다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판결은 처음 보는지라 어제는 분을 삭히며 일찍 잠이 들었는데, 오늘 다시한번 헌법재판소 결정 전문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헌법재판관 9명 중 절반 남짓인 4~5명도 아니고 다수라 할 수 있는 6~7인이 무효확인청구를 기각했을 정도라면 우리의 분노를 거스르는 무슨 대단한 논리가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헌법재판소 결정문 중 결론(극적 반전)에 해당하는 각 법률안 무효확인청구에 대한 판단 부분을 보자. (길어서 그냥 접어두지만, 재판관들의 판단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논거'에는 따로 표시를 해두었으니 한 번 살펴보시길 권한다)
미디어법 무효확인청구에 대한 판단 (헌재 결정문 발췌)
위에서 보듯이 기각의견을 낸 재판관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절차상 문제도 없다고 판단한 민형기, 목영준의 의견은 제외한다)
1.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입법결정과정의 무효를 '선언'할 권능이 없다. (이강국과 이공현. 김종대도 같은 취지이다)
2. 미디어법 가결 절차에서 다소간의 흠결이 있었던 점은 인정되나, 그것이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의사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이동흡)
뭐랄까.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헌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하던 헌법재판소의 입장과는 비교될만큼 소극적인 자세들이다. 이러한 소극적 자세가 식스센스에 버금가는 '절차는 위법이지만 미디어법은 합법'이라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요체다. 여태동안 '니 말 다 옳아'라고 해놓고 막판에 가서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나서기에는 좀 그렇다...' 라고 뒤통수 치는 격이라고 할까. (2번처럼 갑작스레 헌법으로 도망가버리겠다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
헌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인용되어야 하는 최후수단이긴 하지만, 그러한 최후수단적 성격에만 매몰되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헌법은 모든 법 위의 정점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모든 법들에 세세히 젖어들어야 하는 '광활한' 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령체계의 측면에서 헌법과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행정처분 따위가 헌법재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일각에서 헌법재판소가 '정치를 하려 한다'라는 의심을 갖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즉,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적극적 해석을 통한 헌법정신의 수호보다는, 소극적 해석을 방어선으로 설정해놓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번처럼 '각론은 위법인데 총론은 합법(어쩔 수 없다)'라는 해괴한 결정을 내리면 그러한 의심의 목소리는 커져만 간다.
(한편으로 헌법재판소가 별도의 견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 민주적 정당성에 비해 지나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의식도 한계로 지적될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정치를 하려 한다'라는 위의 의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의 입장은 헌법재판소가 자신들에게 놓인 사안의 정치적 파괴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따져 '몸을 사린다', 더 냉정하게는 '눈치를 본다'라는 생각이다.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하는 법관들이 사실은 '눈치를 본다'는 것이 그들에게 수치요,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헌법재판소 결정들을 곰곰히 살펴볼 때 일관된 법칙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고향인 사법부의 굴종의 역사와도 맞닿아있는 셈이다.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해본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을 복기해보자. 탄핵심판을 기각한 그들이지만, 의외로 안 알려진 사실이 있다. 사실 헌법재판소는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주장한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공무원 중립의무 위반에 대해서 상당한 이유가 있다(a)고 인용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정도가 탄핵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는 논리(b)를 펼쳤고 그로 인해 탄핵신청을 기각(c)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논리전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 a) → (논리 b) → (결정 c)로 이어지는 논리전개에서 어쩌면 헌법재판관들은 (결과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부활의 기회를 주었지만) 본래 (a)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몰고올 사상초유의 권력공백사태에 '겁을 먹은 나머지' 정치적 판단인 (결정 c)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서로 상반된 (생각 a)와 (결정 c)를 잇기 위한 논리로 (논리 b)를 들고 나왔던 것이 아닐까. 탄핵심판 이후 한나라당과 수구진영에서 제기된 '일부 헌법재판관이 탄핵심판 기각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행정수도 이전문제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측(수구세력)의 손을 들어준다. 당시 헌법재판소가 들고 나온 이른바 '관습헌법' 이론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사실 문제의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의 유일한 결정근거는 오히려 '지난번에 정부측 손을 들어주었으니 이번에는 반대편 손을 들어줘야 한다'라는 정치적(...) 판단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미 (결정 c)의 답은 정해져있었고, (생각 a)는 아예 첫 단계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당시 결정문을 보면 (생각 a)와 (논리 b)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 둘을 함께 아우르는 논리가 그 유명한 '관습헌법' 이론인 거고)
......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능을 이해하고(또한 믿고!) 헌법정신의 수호를 위해 그 힘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는 헌법재판소의 태도는 사실 권력의 눈치를 보던 사법부 굴종의 역사와도 맥이 닿아있다. '절차는 위법하나 결과는 합법'이라던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을 통해 나는 그러한 결정을 내린 안국동 판사들의 심약함이, 재벌회장들에게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경제발전에 노력한 공을 참작하여...' 라며 집행유예를 선고하던 서초동의 판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더더욱 굳히게 되었다. (서초동 판사들은 이제 재벌회장에게 적극적으로 '무죄'를 선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헌법재판소도 간혹 위헌결정을 내리곤 한다. 하지만 두 정치세력이 충돌하는 '정치적' 문제에서는 놀랍게도 '너희들끼리 해결해라'라는 심약한 태도를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 결국 3부 권력에서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함에도, 이제 헌법재판소는 서초동의 사법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옥상옥'의 기관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려버렸다. (이상돈 교수가 얘기한 '자신을 향한 폭탄'이라는 표현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결국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바라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선거'의 문제다. 헌법재판관 9인은 대통령(3인), 대법원장(3인), 국회(3인)가 결정한다. 이 중, 대통령과 국회는 '선거'로 선출/구성되고, 대법원장 역시 대통령이 지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헌법재판관의 선출 역시 '선거'에 의해 영향을 받는 셈이다. 물론 간접적인 영향이고, 확실히 지켜지는 임기제 때문에 4~5년마다 치뤄지는 선거의 영향력은 더욱 더 감소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헌법재판관 역시 정치권력의 자장(磁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선거에 의해 제대로 된 정치권력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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