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방송 2003/04/02 04:16
간간히 주말저녁 늦은 시간에 방송되곤 하는
TV단막극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단막극의 매력에 젖게 된 것은
아무래도 여기 온 뒤가 아닐까 싶다.
'영상으로 보는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5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간결하면서도 잘 짜여진 -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
단막극을 보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게 없는 이곳 생활에서
내게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가끔 가다가
극작가가 '정말 쓰기 싫어 밍기적 대고 있다가
간신히 방송국에 넘긴' 게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50분 동안 보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로
수준 낮은 작품이 걸리면
그 다음 주 일과마저 '황'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茶香'처럼 서정적이건,
'천생연분'처럼 코믹하건간에
(사실 이건 좀 안 웃겼다.
한국에서 봤던 '왕제비 무도별곡'이 제일 웃겼지)
함께 토요일 저녁을 마무리 하기에는
더할나위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겁게 보는 주제는
'방송용 드라마의 생래적/당위적 보수성'을 뒤엎는,
도발적인 주제들이다.
(대개 19 동그라미 딱지가 붙어있는...)
그리고 공교롭게도
(보수적인) 내가 무척 충격먹으면서도 즐겁게 본 두 작품,
'그래도 사랑은 빛이다'와 '나의 아내는 정숙하다'의
극본(각본?) 크레딧에는 둘 다 나란히
'이은상'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방영된지 한참 됐지만
'그래도 사랑은 빛이다'에서
아내에게 헌신적이지만 앞을 못보는 남편 해상이 병원에 있는 동안
전(前) 애인 유민의 끈질긴 재(再)구애에
마침내 그를 받아들이며 소희가 무너지듯 자신의 아파트 문을 '철컹' 열던 소리에
보는 나마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던 통증은
- 아, 그래... 그건 정말 '통증'이었다 -
아직도 내 심근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는 듯
생생하다.
이 작품 '나의 아내는 정숙하다'에서도
역시 작가는 자신의 전작에서처럼
착하고, 헌신적이고, 배우자에게 충실한
'보수적인 결혼생활'이란 것을
끝에 가서 결국에는 파괴해 놓는다.
이러한 작가의 악의적인 파괴가
변태적이라거나 파괴욕, 심술 뭐 이렇게
폄하되거나 애써 무시될 수 없는 것은,
중간에 태수가, 아름답지만 보수적이고 정숙한
(남의) 아내 미연을 유혹하기 위해
'시선을 먹고 사는 여자'론을 얘기하며
그녀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감춰왔던
그녀 안의 과시욕과 허영을 도발시키는 부분의 대사가
대단히 정교하게 짜여져있기 때문이다.
물론 태수라는 인물의 정체가
나중에 밝혀지면서
태수의 미연에 대한 유혹이
의도적이고 계산된 것이었다는 게 드러나
보수적인 시청자들에게
일말의 안도감을 되돌려 줄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작가가 정말 공을 들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인과관계로 연결된 그러한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라기보다는
중반부, 태수의 입을 빌어 표현되는
'시선을 먹고 사는 여자'론의 대사와
서서히 태수에게 치명적으로 끌려들어가는
미연의 행동에 대한 묘사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한 중반부 태수의 대사와 미연의 심리적 갈등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심리를
대단히 치밀하게 관할한 결과로서,
작가의 역량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구어체로 표현되면 어색하기 짝이 없을
그 미묘하고 정교한 서술을
무리 없이 잘 대사화시킨 능력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고.
(대사를 어색하게 만들어
배우에게 '기미독립선언서' 읊게 만드는
자격미달의 극작가는 또 얼마나 많던가)
어쨌거나 작가는 '그래도 사랑은 빛이다'에서도
헌신적인 아내를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가게 했지만
끝에는 아내를 떠나보낸 해상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며
'방송용 드라마의 생래적/당위적 보수성'을 포기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즉, 여기서는
소희가 해상을 버리고 유민을 택하는 부분이
해상의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은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나의 아내는 정숙하다'에서 작가는
그러한 보수성을
마음껏 파괴해본 것 같다.
얼핏 보기에는 복수극 드라마로 읽힐 수도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反보수적인(또는 보수파괴적인) 요소들이 은폐될 수 있겠지만
(결말도 사실 꽤 충격적이긴 하기 때문에
결말의 충격으로 중반부의 도발성을 잊어버리는 시청자도
꽤 됐을 거다)
반어적인 제목에서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이 작품의 매력은
섬세한 관찰로 얻어진,
태수가 여자의 심리를 읽어내어
미연을 도발시키는 중반부에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괜히 잘 살고 있는 부부 왜 건드리냐'하고 항의한다거나
더 나아가 저질, 퇴폐 운운하며 쓰레기 취급하기에는
작가의 관찰력과 언어구사력이 너무 억울해지는
그런 드라마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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