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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한국인들은 공무원 같은 안정된 직업을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경제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바탕으로 '안정적 직업'을 우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경제력이 어느정도 해소된 계층에서마저 한국사회에 대한 애착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굉장히 운좋게 들어가긴 했지만 나도 이른바 공기업에 다니고 있고, 집사람 역시 공립학교 교사다. 직업적 안정성만으로 보자면 우리는 대한민국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그러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경제적 문제로 고민하거나 미래를 불안하게 여겨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써놓고나니 굉장히 재수없군...)

이러한 상황은 우리 부부의 직장동료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맞벌이가 아니더라도 양 직장의 동료들은 그리 박하지 않은 월급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장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앞서 고백한대로, 우리 부부가 만난 모든 사람은 우리 아이의 미국출산에 대해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에서 살기에 별 문제가 없음에도 한국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한국사회에서 사는 데 그다지 큰 문제 없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왜 이중국적에 비판적이지 않는가?"

이것 역시 답은 간단해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사는 게 문제가 없다는 것과 한국사회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국가의 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그 국가나 사회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역시 사람이란 돈과 경제력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교훈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안정적 직업군마저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 모순에는 무언가 깊고 심대한 것이 있는 것 같다.

...... "만나는 분들마다 다 축하한다고 하니 무척 당황스럽네요" 라는 나의 고백에 누군가가 이런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럼 축하할 일이지. 옵션을 하나 더 갖는 건데."

옵션.

국적마저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것으로, 영영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믿어왔던 '국적'도 이제는 선택할 수 있다. 하기사, 생물학적 특질마저 골라서 태어날 수 있는 시대인데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국적이란 개념 따위야 아무 것도 아닐테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 '한국와 미국, 둘 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라는 거였다. 상황을 봐서 18년 후에 둘 중 하나를 고르겠다...라는 것. 단순히 '기회주의적이다'라고 배척할 게 아니라 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미국인으로 태어나기 위해 계획적인 원정출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LA에는 3천달러 정도의 현금을 일시납 하면 산모검진부터 출산, 산후조리까지 다 책임져주는 한국인 산부인과가 성업중이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출산비용이 15~20만달러까지 달하는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고려할 때, 3천달러는 굉장히 저렴한 금액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처음부터 아이를 미국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을 나로서는 판단할 입장이 아닌 것 같다)

......

하나의 해법보다는 2개의 해법을 갖고 상황에 따라 골라쓸 수 있는 편이 낫다, 그런 마음인가?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해법을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안쓰러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국도, 미국도, 그 어느 쪽도 완벽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18년 뒤에 그나마 더 나아보이는 사회로의 정착을 결심할 때까지 두고보자는 생각.

그나마 여기까지가, 내가 추론할 수 있는 최대인 것 같다. 왜 한국을 떠나고 싶으세요? 왜 미국으로 쉬 결정하지 못하세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의 주관과 가치관에 의지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개 결심들의 총합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딸을 위해서 아비의 입장을 밝혀둘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결국 앞에서 쓴 장광설들은 지금부터 쓰게 될 지극히 개인적인 변명(?)의 서론이었던 셈인가...?)

1. 샌디에고 연수에 지원했을 때, 뱃 속의 아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비중은 굉장히 미미했다. 딸이 이중국적을 갖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은 해외연수로 누리게 될 많은 결과(가치중립적인 의미다) 중 하나로 인지되었을 뿐이다. 해외연수 지원의 가장 큰 이유는 '탈출구'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2년 동안의 기획부 생활에 많이 지쳐있었고, 결혼 이후 신혼다운 신혼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집사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2. 굳이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가급적 독일이나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같은 유럽의 중도국가였으면 싶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을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선택하지만, 나는 미국을 완벽한 국가로도,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보여준 많은 실망스러운 모습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은 스스로의 내부시스템마저도 불완전해보이기 때문이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정치/사회/언론시스템, 빈약한 사회보장제도, 스스로의 생산능력을 잃은채 소비와 빚만으로 지탱되는 불건전한 경제구조 등등... 미국의 강점으로 여겨지던 국토의 광대함과 사회시스템의 안정성은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이 10년, 20년 뒤에도 해소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리라는 믿음을 강화시켜준다.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이 그 큰 덩치 때문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버린 것처럼.

3.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도덕성, 변화에 대한 적응력 등은 오히려 미국보다 한국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있고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큰 흐름으로 볼 때 한국의 시민계급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해왔던 것 같다. 강남집값이니 조기유학이니 하는 것들처럼 그들이 개별사안에서 눈 앞의 이익과 욕망에 굴복했던 적이 많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겼다. 그 부끄러움들이 모이고 쌓여 중요한 순간마다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큰 역사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불합리한 일들은 나에게 '과연 한국에 희망이란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갖게 한다. '50년 집권 프로젝트'라는 말처럼, 그들이 추진하는 작업들은 사회통합을 어렵게 하고, 깊은 상처를 남기며, 무엇보다도 그것의 시행 이후에는 다시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그러한 것들 뿐이어서 과연 이 정부 이후에도 한국이 제대로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든다. 과연 나는 18년 이후에도 내 딸에게 '그래도 한국은 건강한 국가로 성장해나갈 것이다'라고 얘기해줄 수 있을 것인가?

4. 이중국적자로서 세계의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라... 이런 상투적이고 군색한 바람은 갖지 않으련다. 그저 내 자식이 자신의 이중국적이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원정출산에 의한 것이 아니며, 부모 역시 한국에 대한 환멸 또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아주면 좋겠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지만(요즘 같아서야 하루에도 몇번씩 이민가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하지만서도...) 내 자식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세계인으로서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따라 자신이 속할 사회에 충실한 일원으로 자라준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어느 사회를 선택하든, 18세 이전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두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으로, 건강한 사회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에 맞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2009/07/23 13:25 2009/07/23 13:25
http://morehj.com/blog/trackback/790
현만이  | 2009/07/24 07:57
사람들이 부럽다고 하는 것이 대개는 미국으로의 여행이나 유학 정도를 염두 두고 하는 말인듯 합니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서 아이를 키웠는데, 자식이 미국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하길 바라는 부모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문제는 많은 경우 한국이냐 미국이냐를 선택하기 위해 사람들이 아기에게 이중국적을 갖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더 잘살기 위해 그런다는 데 있습니다. 예로 드신 '강남에 집사기'나 '조기유학 보내기'와 다르지 않게 원정출산에 대해 부끄러워해야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의 우수 대학으로 유학도 쉽게 하고 돌아와서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두 사회의 이득을 다 취하겠다는 기회주의자가 되는 거죠.

정말로 한국사회에서 불안한 사람들은 원정출산 따위를 계획할 여력이 없습니다. 아예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떠날 지는 모르지만요. 원정출산이 지탄받고 문제가 되는 것는 한국사회에서 이미 중산층 이상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득을 누리기 위해 계획적으로 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쭝님은 원정출산을 계획하신 것이 아님에도 결과적으로 같기 때문에 찜찜한 마음이 드시는 게 아닐까요.
  | 2009/07/27 04:59
찜찜한 마음이 드는건 아니구...그냥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어.
비밀방문자  | 2009/07/30 18:49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2009/07/30 11:30
부모로서 좀 떳떳하고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고 싶네요. 애 키우면서 성숙해진다는 게 이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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