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소설과 그리 친하지는 않은 것 같다. 누차 밝혔지만, 원체 픽션을 업수이 보는지라 '상상의 끝'까지 달려가버린 SF문학이라면, 그러한 '꾸며냄'의 숲 속에서는 진실, 사유, 고민과 같은 것들이 자랄 수 없다고 지레 생각해버렸던 듯 하다. 그저 킬링타임용의 오락이라면 모를까, 장르 자체에 접근하지 않았던 나의 편협함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쉬 빨갱이로 분칠해버리는 늙은 예비역 군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 싶다.
하지만 모든 미워하는 것들은 의외로 애정과 거울상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 법이어서, 나와 SF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과학회관인가를 갔다가 사온 과학만화책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울 정도로 신나게 봤고, 3학년 때는 원래 학교도서실이던 우리 교실의 이점을 활용해 '우주소년 케믈로'니 '양서인간'이니 하는 아동SF소설집에 빠져지내느라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더러 '얘는 추리소설과 SF소설만 읽으니 균형잡힌 독서교육이 필요한 것 같아요'라고 하실 정도였으니까.
그때가 딱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이 때라면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을 비롯해 냉전으로 촉발된 우주개발(사실은 군사무기화)의 꿈이 뉴스를 타고 여과없이 흘러나오고, 남자아이들의 장래희망 1위가 아직 '과학자'였던 시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과학의 인기와 운명이 이렇게 떡실신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읽은 많은 SF소설들은 결국 일본의 소년문고들을 중역한 날림번역의 책들이었을텐데, 같은 시기 원전텍스트가 유래된 옆나라 일본에서는 이 '2001 스페이스 판타지사'와 같은 심오한 수준의 SF만화가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오늘 구입하여 3권을 단숨에 읽어버린 이 만화가 그려진 때가 지금으로부터 딱 25년전인 85~86년임을 얘기하려다보니 이렇게 멀리 돌아오게 됐다. 기술이나 사회발전단계에서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정확히 23년 뒤쳐져있다는 어느 유력설(說)을 빌자면 25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진 이 만화의 정식발매가 별일도 아니지 싶지만, 25년전 일본의 거장이 달성한 이 작품의 철학적, 서사적 성취를 과연 오늘날 우리나라의 만화에서도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만화계, 문화계가 열등하다는 의미보다는 시대를 앞서나간 이 우주서사시 3부작의 위대함을 되새겨보고자 함이다.
한권에 대략 6~7개의 에피소드를 담은 단편집이다. 우주개발과 생명, 인간의 갈등과 미지에 대한 경외를 거대한 과학적 상상력 속에 녹여넣은 에피소드들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퍼즐맞추기를 하듯 서로가 이야기를 공유하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처럼 하나의 큰 흐름을 밀고 나간다. 그 큰 흐름은 각 권마다 나름대로 테마를 이루며 진행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 - 우주진출에 대한 인류의 도전과 그 첫 걸음
2권 - 정복, 전쟁 등 지구에서 저질렀던 과오를 우주에서 되풀이하는 인류의 그릇된 모습들
3권 - 우주개발에 지친 인류가 다시금 찾게 되는 마지막 희망 - 외계지적생명체와 인류파종계획
1권의 초반부 에피소드와 3권의 최종장이 연결되는 수미쌍관구조가 마치 우주 그 자체와도 같이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내가 가장 걸작으로 꼽고 싶은 에피소드는 1권의 마지막 에피소드(2개 에피소드의 연작)였다. 우주탐사와 마왕성(루시퍼라는 가상의 태양계 제10행성을 설정)의 발견, 반물질을 우주개척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려는 과학자들과 신의 영역을 넘지 말 것을 주장하는 바티칸의 대립이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는 밀턴의 '실락원' 내용도 좋았고... '극한상황 또는 한계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인간(인류)의 딜레마와 갈등'이라는 주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과학과 신의 관계를 다룬 이 에피소드야말로 현 과학단계에서 가장 우리에게 와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중한 서사시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은 일본만화가 중 작화력 순위로 탑10 안에 든다는 작가의 섬세하고도 우아한 극화풍의 그림이다. SF만화가 빠지기 쉬운 작화상의 장르적 유치함을 멀리하고 이야기의 신뢰도까지 높이는 효과를 거뒀구나 싶다. 물론, SF장르에서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고증에 대해서도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PS : 호시노 유키노부의 작품이 정식발매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 한다. 2001년에 학산문화사에서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라는 단편집을 낸 적도 있고, 몇 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게 있는 모양인데 현재는 모두 절판이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를 구해 봤는데 역시나 작가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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