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책없이 바쁜 하루였다.
6시가 되자마자 기운이 다 빠져 털썩- 자리에 앉아서 또다시 야근준비를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짐 싸들고 퇴근해버렸다.
만들고 있는 비행기의 디테일업 금속부품을 자작해볼까 하고 을지로를 돌아다니다가
생각했던 가격보다 제작비가 훨씬 비싸게 먹힌다는 걸 알고
그냥 포기한 채 청계천 공구상가에 가서 0.8mm 핀바이스 드릴을 20개나 샀다.
드릴 하나에 6백원이니 12,000원을 쓴 셈.
* 모형인들을 위한 고백 : MiG-27K의 Chaff / Flare Dispenser 몰드를 포토에치로 만들어볼까 했으나, 코딱지만한 금속판 4개 만드는 데 30만원 이상 줘야 한대서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나왔음.
저녁으로 청계천 뒷골목 식당에서 혼자서 7천원짜리 갈비탕을 느긋하게 먹고
어슬렁어슬렁 충무로쪽으로 나갔다.
역시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이번에 처음 안 건데
을지로 3가에서 충무로 나가는 쪽에 인현동이 있더라.
인쇄골목으로 유명한 동네라지만
우리가족에게는 우리 큰고모가 예전에 살던 동네였다는 의미가 크다.
큰고모가 겪어낸 지난 風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늦은 저녁, 오래된 서울의 뒷골목은 스산하고 적적했다.
그렇게 충무로로 빠져나와 대한극장에 가서 '일루셔니스트' 표 한 장을 샀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끼리 한참을 떠들어대던 매표소의 두 아가씨는
내가 뻘쭘하게 '일루셔니스트 여덟시 반꺼 표 한 장이요' 하고 부르자
그제서야 '네~' 하며 표를 내준다.
뒤돌아서는 내 뒤로 두 아가씨가 다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양복입은 남자가 혼자 표 한 장을 사는 게 이상해보였던 걸까.
괜히 멋쩍기도 했지만, 뭐.
분명히 통로쪽 좌석을 달라고 했는데 통로쪽 좌석이 안 보인다.
차근차근히 번호를 따져보니 내 자리 K16번에는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커플女가 앉아있다.
불 환한 영화관 안에서 예고편 시작하기 전부터 지들끼리 좋다고
남자친구랑 엉겨붙어있는데
그걸 보고 괜히 뿔이 나서
'그 자리 맞으세요?' 라는 소리를 조금 까칠하게 해봤다.
내 눈치 살피며 한칸씩 옆자리로 옮기는 그 커플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한번 세워주고 싶었지만
남자놈이 싸움을 잘하게 생겨서... (나, 원래 비굴 빼면 시체다)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원래 에드워드 노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제 이놈도 초기의 샌님 같은 이미지를 벗고 점점 '성장'하는 것 같아 보기 좋다.
가녀리고 졸린듯한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눈빛과 분위기가 그 목소리마저 묘한 역설로 만들어낸다.
에드워드 노튼 원톱이면서도 투톱을 내세웠던 '프레스티지'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전이 거듭되면서 어둡고 우울했던 '프레스티지'도 좋았지만
이제까지의 어두운 분위기를 마지막에 유쾌한 반전으로 뒤집는
'일루셔니스트'도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영화를 한 편 보고 또 7천원을 소비하고 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 쓴 돈은 12,000 + 7,000 + 7,000 = 26,000원.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써버린 듯 하다.
이렇게 터벅터벅 집에 오니
아버지가 일요일 저녁에 친척집 돌잔치 가자고 하신다.
큰고모 손녀(나한테는 조카)가 돌이 된 거다. (벌써!)
일요일 저녁에는 좀 쉬고 싶어 안 가겠다고 했더니
안가더라도 10만원 정도 내라고 하신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그런 좋은 자리 있으면 돈도 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난 오늘 나 자신을 위해서 하루만에 26,000원도 거침없이 쓰고 왔는데,
그런데도 갑자기 '10만원'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콱 막혀왔다.
어차피 나중에 나한테도 다 돌아올 돈이라고는 하지만
왜 자꾸 기꺼운 마음으로 돈을 내지 못할까.
내가 회사 다니며 적당한 정도의 돈도 벌고
이제는 부모로서 아들에게 돈도 받아 써보고 싶기도 하시고
그런 건 알겠지만
난 어지간해서는 그런쪽 경비를 최소한 줄이면서
나를 위해 돈을 쓰고 싶은데
갑자기 그 '10만원'이 돈 10만원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30-4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짊어지게 될
'큰놈(맏이)의 무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콱 막혀왔던 것 같다.
혼자서 청계천, 을지로를 쭐래쭐래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다고 휙~ 극장에 가서 영화 보고...
난 이런 생활이 너무 좋은데,
앞으로 장가 가고 애를 낳고 하면 이런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걸까.
영화 '세븐'에 나오는 모건 프리먼처럼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솔직히 아이도 갖고 싶지 않은데...
올해 장가 가기로 마음 먹은 나로서는
장가듦과 동시에 찾아올
이런저런 무게들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
이기적인 생각인 거 맞기는 한데
'너무' 이기적인 생각은 아닌 거지, 응?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맏이들이라면
당연히 느낄만한 그러한 버거움 아닐까.
난 그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함 없이
평범하고 합리적인 시민사회의 일원이고 싶을 뿐이다.
돈 아까워서...라기에는
돈 10만원이 던져준 고민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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