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
몇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면 이거 완전 땡잡은 거 아닌가?'
라는 두리뭉실한 생각으로 한미FTA를 바라봤다.
한국 최대의 수출시장 문을 완전히 활짝 열어젖히기 위해
어느 특정 산업분야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 수출대상국과 전면적인 경제'동맹'(왜 작은따옴표를 쓰는지는 밑에 얘기한다)을 맺는 것이
정말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던 거다.
더구나 나는 이런 나의 생각이 나름대로 논리성을 갖췄다고 생각하여
한미FTA 반대론을 저 논리 하나로 다 무마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반대론을 찬찬히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
이상의 상황이 한미FTA 지지론자, 아니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생각일 거다.
(오히려
'아니, 반대시위를 하려면 우리나라에서나 하지,
왜 미국까지 가서 나라망신을 시켜?' 라면서
원정시위대 욕을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요 근래에
한미FTA 반대론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나의 어설프고 두리뭉실한 지지논리들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반대논리들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제는,
'세상에...! 한미FTA가 체결되는 순간, 이 나라는 파탄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겠구나'
하는 거대한 두려움마저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미FTA 반대론의 논거는
웹 여기저기에서 너무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한미FTA의 문제점 몇가지만 짧게 언급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아래의 문제점들은 한미FTA의 모든 논점을 다 커버하지는 못하며, 서로 중복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점들을 위주로 적어본다)
1. 성급성의 문제
more..
원래 우리나라는 산업분야가 중복되지 않는 칠레와 같은 나라를 상대로
'낮은 단계의 FTA'를 연달아 맺으면서 차츰 일본, 미국을 상대로
'높은 단계의 FTA'를 맺으려 했다고 한다. (소위 '로드맵'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FTA라 함은
한 나라의 대내경제가 외부적 효과에 의해 크게 영향 받게 되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외 협상력이나 한국경제의 대미의존도를 고려해서
미국과의 전면적인 FTA를 맺기 전, '준비운동'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 초기의 이러한 FTA 계획은 현재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현재 우리 정부가 한미FTA를 체결하려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이야기다.
어느 사건의 '구조적인 개연성'보다는
그 사건을 이루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나로서는
'청와대 비사(秘史)'라 할 수 있는 정 전 비서관의 이야기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요지는 이렇다.
'사회적 통합'과 '개혁에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 노사정 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개혁을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안 방폐장 문제 등에서 보듯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모습에 낙담한 노무현의 다음 선택은
국회 안의 야당만이라도 끌어안고 가는 '대연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연정은 그야말로 혼자만의 쇼로 끝나버렸고
그 다음으로 노무현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외부적 충격에 의한 개혁'이었다는 거다.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FTA 체결이라는 의제를 들고 나와
대통령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정부가 한미FTA에 드라이브를 걸게 된 하나의 이유라는 것이다.
어떤가?
물론, 한미FTA 협상 개시의 이유가 저것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나라의 경제패턴을 송두리째 바꿔버릴만한 메가톤급 정책집행치고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졸렬한 시발(始發)이 아닐까?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실으면서 헤드라인으로 뽑았던
'노무현의 개혁의지와 김현종의 야심이 만났을 때'라는 문구가
이상의 상황을 가장 간결히 묘사하고 있다.
2. 서비스업 개방의 문제
more..
기본적으로 우리 정부(= 노 대통령)의 의중은
세계 최고의 서비스 산업을 갖춘 미국과의 FTA 체결로
한국의 서비스 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다는 데 있다.
지지론자들은 이야기한다.
미국의 로펌들이 한국에 진출하고
한국의 로펌들도 법률소비자들을 위해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장밋빛 미래를 생각해 보라고.
......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흘러갈 수 없다.
냉정히 생각하여, 당신이 한국 제1위 로펌의 대표라고 해보자.
세계 최고인 미국의 로펌들이 한국에 진출했을 때
당신은 그들과 싸워서 1위를 '지키려' 하겠는가,
아니면 그들과 손을 잡아 덩치를 키우고 수익을 적절히 분배하여 1위를 '굳히려' 하겠는가.
앞의 것은 정부의 논리(희망사항)이고
뒤의 것이 현실적인 시장의 상황이다.
즉, 싸우지 않고 제휴, 합병을 통해 '안전한 길'을 가길 원하는 거다.
(이러한 국내 경제주체들의 선택은 자연스레 다음의 논리인
'경제종속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FTA 체결로 유발될 수 있는 고용창출과 성장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울러, 큰 그림을 한 번 더 보자.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서비스업'이란 개념은
금융, 법률, 회계와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말한다.
(요식업, 자영업과 같은 서민형 업종도 학문적으로야 '서비스업'에 해당하겠지만,
여기서는 논외다)
현재에도 이들 시장은 최고급 인재들만이 진입하여 돈을 벌고 있다.
한미FTA가 체결됐을 경우, 이 시장의 경쟁이 더 치열해진다면
(일단, 서비스업 개방으로 공급자의 수가 기본적으로 늘어난다는 의미다)
시장 내부에서도 양극화가 벌어지게 된다.
최상위 계층이 이럴진대, 일반 계층의 양극화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거나 한미FTA의 서비스업 개방은 서비스업의 발전은 커녕
사회 전체의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가속화 시킬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그리고 제조업과 기타 업종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자.
정부가 한미FTA 체결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서비스업의 발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힘들어죽겠다는 제조업쪽의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
막연하게만 생각한다면,
한미FTA가 체결되면 수출중소기업도 대미시장 공략에 도움이 되겠지 싶겠지만
여태동안은 FTA 체결이 안돼서 미국시장 뚫기가 어려웠나?
오히려 중국의 노동력을 이용해 가격경쟁력까지 갖춘 미국산 제품들이
한국시장 공략에 더 열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는 청계천에만 가도 쉽게 살 수 있는 공구류마저도
이제는 미국제 블랙앤데커나 드레멜이 브랜드인지도와 품질로 밀려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3. 공공경제 붕괴의 문제
more..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경험에 따르면
미국은 FTA 조약문에 강력한 구제조항을 삽입한다.
(공개된 협상초안문에도 이 조항이 들어있음이 확인됐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진출한 미국기업이 우리나라의 공공정책으로 손해를 입은 경우
정부를 상대로 국제법원이나 국제기구에 '제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환경부 등이 미국기업에 내린 행정처분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기업에 의해 국제기구 앞에 제소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기관들은 우리나라 재벌들로부터도 미움을 받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재벌들은 앞에서 투덜거리긴 해도
정부를 상대로 국제기구에 '제소'할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미FTA 체결은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며,
이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불러올 결과는 '공공경제의 붕괴'다.
이윤만을 좇으려 하는 시장의 흐름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공공'의 영역이 붕괴되는 것이다.
4. 경제종속의 문제
more..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서비스업을 위시한 우리 경제의 많은 부분은
'외부적 충격'에 의해 자체 경쟁력을 갖추기보다는
'외부' 그 자체에 동화되어 버리는 안전한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 길을 자발적으로 택할 수 있는 쪽은 그나마 다행이다.
농업, 중소제조업과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경제에 자연스레 흡수, 동화되어버릴 것이다.
이 '경제종속의 문제'는 그다지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주'(自主)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서
한미FTA의 문제점을 논할 때 이 '경제종속' 이야기만 하면
'너 좌파지?' '너 한총련이지?' '너 빨갱이지?'와 같은
유치한 말다툼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이 민족자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미FTA의 반대논거로 드는 '경제종속'의 문제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시길 권하고 싶다.
5. 동북아시아 안보의 문제
more..
한미FTA의 파급효과는 경제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두들 경제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좋든싫든 이것은 우리의 안보환경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한미FTA가 미국경제권으로의 편입을 가속화 시킨다고 할 때,
한국-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남방 3각 동맹'도 가속화된다.
자연스레 중국-북한-러시아의 '북방 3각 동맹'이 공고화해지고
한반도는 다시금 두 3각 동맹의 최전선(front line)으로 열화(熱化)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미국은 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줄을 타면서(그래, 정말 줄타기지...)
지역갈등을 완화시켜가며 독자생존을 모색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일본은 2차 대전 때 저지른 과오 때문에,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경제패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국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
(일본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일원'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고이즈미 이후 가속화하는 미국과 일본의 밀월관계는 일본 스스로가 원한 것이며,
이러한 '미국 모시기'에 우리까지 부화뇌동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남방 3각 동맹'을 자초할수록
통일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도 멀어지며,
이는 역으로 우리의 한미FTA 협상과정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한국과 일본이 저희들 스스로 미국을 불러들이겠다고 나서고 있는 마당에
미국이 과연 FTA 협상에서 한국의 입장을 반영해줄까?
.............
한미FTA가 우리 경제와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에 비해
우리 국민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월드컵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 깐깐한 강준만도
'월드컵 때는 흐드러지게 한번 놀아보자, 원래 사람은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아니던가!'
라며, 신나게 즐길 것을 권했지만
(한겨레21이었던가...?)
지각 있는 사람들이 월드컵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노는 데는 젬병이라, 남들 잘 노는 거 보는 게 배 아파서'라거나
'남들 잘 놀 때 혼자 근엄한 척 해서 튀어보이려고'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즐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즐기는 것에 빠져 '놓쳐서는 안될 것'을 놓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오늘, FTA 협상단이 미국으로 출발했단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협상 개시'의 의미를 마음에 두고 있을까.
모두들 밤 11시에 있었던 가나와의 평가전에 더 마음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협상을 6월부터 개시한다는 것은
월드컵으로 국민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책??)
다행히
언론의 월드컵 광풍이나 대기업들의 월드컵 마케팅에 반대하는 흐름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고는 있지만
이것이 '어우, 쟤들 뭐야~' 수준의 비판에 그치면 안되겠다.
'월드컵에 빠져 현충일과 순국선열들을 잊지 말자' 라는 외침에 덧붙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한미FTA에 대해서도
한번씩 생각해볼 시간을 갖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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