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3/09/30 21:30
언어의 의식조작적 기능의 實例
법학과 96xxxxx 윤현중
1. 처음
언어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 뿐 아니라 경험의 축적이나 타인행위의 조절, 통제 또는 의식의 조작 등과 같은 여러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중, 언어의 의식조작적 기능은 언어가 자신이 갖는 본래의 문언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자와 청자 간에 합의된 가치관이나 (때에 따라서는) 편견, 선입견 등을 재확인하고 더 나아가 공고히 하는 기능을 뜻한다. 그 실례(實例)로 여기서는 '사법고시'라는 말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사법시험'과 '사법고시'
고등고시(高等考試)는 1949년 제정된 '고등고시령'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며, 사법과(司法科)와 행정과, 그리고 1954년 신설된 기술과의 3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등고시령이 1961년 제정된 '공무원고시령'으로 대치되면서 기술과가 폐지되었고, 1963년 4월 개정, 공포된 '국가공무원법'에 의해 행정과시험은 '3급공무원 공개채용시험'으로 대치되었으며, 같은 해 5월 공포된 '사법시험령'에 의해 사법과시험은 사법시험으로 대치, 존속하게 되었다. 또한 시험성격이 종래의 자격시험에서 채용시험으로 바뀌었고, 관할기관도 고등고시위원회에서 총무처로 옮겨졌다.
3. 현황
위에서 본 것처럼, 현재의 고등고시 제도에서 법조인을 뽑는 제도는 '사법시험'으로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법시험'보다는 '사법고시'라는 명칭이 더 자주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적인 매체인 언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고시 1차과목 절반 축소…법학 35학점 이상 들어야"(국민일보, 2001년 3월 12일자), "사법고시의 경우 올해보다 150~200명 가량 늘어난 950~1천명이 될 전망이다"(연합뉴스, 2000년 12월 27일자), "전북도가 사법고시 합격자를 채용하기로 하는 등 개방형 인사정책 활성화에 나섰다"(중앙일보, 2000년 12월 6일자) 등 언론매체에서 '사법고시'라는 말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행정자치부 보도자료를 토대로 작성되는 기사의 경우, 보도자료를 인용한 부분이냐 기자가 직접 작성한 부분이냐에 따라서 한 기사 안에서도 '사법시험'과 '사법고시'가 혼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정자치부 고시과에서는 모든 공식문서에서 '사법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이것은 대언론보도자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든 연합뉴스 2000년 12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기자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 앞부분 도입부 문장에서는 두 번 모두 '사법고시'라는 말이 쓰이고 있지만, 행자부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 맨 끝 2001년 시험 일정 목록에서는 '사법시험'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사법시험'이라는 말보다 '사법고시'라는 말이 얼마나 우리에게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4. 왜 '사법고시'인가? – 의식조작적 기능
행정, 외무고시 분야는 법적으로 고등고시 제도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공식적으로 대체된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사법시험'보다는 아직까지도 '사법고시'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도 일제시대와 개발시대를 거쳐 우리들에게 깊게 각인된, '고시'라는 말과 '권력', '신분상승' 등의 개념이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미 사법시험 정원의 증가 등으로 사법시험이 갖는 의미는 원래의 고시제도가 가졌던 법조인 선발시험의 의미보다는 '변호사 자격시험' 정도로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는 법을 아는 자 또는 그가 누릴 수 있는 권력과 자리를 동경하는 면이 강하다. 법을 아는 자가 법에 따라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모습보다는, 국민의 법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법을 재단하고 유린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왔으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그 권력의 자리를 동경하는 이율배반성을 지니고 있다. '법'과 '고시'라는,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두 개의 권력장치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법+고시'라는 말은 그 견고한 결합을 쉽사리 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언어외적인 면과 함께 낱말 그 자체가 갖는 언어내적인 특성을 살펴보는 것도 '사법고시'라는 낱말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시'(考試)란 원래 '고등고시'(高等考試)의 마지막 두 글자를 떼어서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시'라는 말에서 받는 느낌은, 마치 그 낱말이 네 글자 중 맨 첫 글자 '높을 高'와 '시험 試'를 합쳐 만들어진 것 같은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실제로 '고시'를 한자로 써보라고 했을 때 '高試'라고 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여기서 알 수 있듯 (물론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만) '높을 高'자는 수준 높은 시험, 어려운 시험, 붙기만 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고 이제까지의 고생을 일거에 보상 받을 수 있는 시험 등 많은 사람들이 고시에 대해 추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높다, 어렵다'는 개념을 포괄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뛰어난 효율성을 지닌 글자이다. 재미있게도 우리말에서 같은 '고'라는 소리값을 가진 한자 중에는 '쓸 苦'도 있는데, 이것은 고시수험생들이 겪어야 하는 힘든 수험생활이나 합격의 어려움 등을 은유(隱喩)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행정, 외무고시와 달리 연령제한이 없는 사법시험은 예전에는 주로 대학교 고학년이나 졸업생 등 비교적 뒤늦게 시험준비에 뛰어든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IMF 구제금융사태를 지나며 사법시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정원이 늘어나면서 수험생의 연령대는 점차 낮아져 지금은 대학교 초년생 때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사법시험'이라는 말은 중고등학교의 '기말고사', '모의고사' 등으로 익숙했던 '고사'와 발음상 유사한 '사법고시'로 대체된다. 세대가 바뀌었다고 하여도 여전히 '고시'라는 말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5. 마무리
문제는 위와 같이 여러 이유로 빈번하게 쓰이는 '고시'라는 말이 청자(聽者)에게도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수용되기 때문에 그 말이 갖는 전근대성과 위압감이 계속 전승된다는 점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위압적이고 무거운 느낌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고시'에 합격했다는 것은 분명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타인을 무시하고 억누르면서까지 스스로를 높이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법고시'라는 말이 주는 위압성과 권력독점성을 순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자격증 시험들이 '시험'으로 이름붙여진 것과 같이 '사법시험'이라는 명칭이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말은 사상에 의해 규정되지만, 역으로 말이 사상을 규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이상(理想)이 진정한 것이 되려면 단순한 말의 사용 하나에 있어서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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