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3/08/04 02:36
밑에 퍼온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에도 나왔듯이
이 방법은 예전 일본 난학자들이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애용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는 원어의 뜻을 '직접적으로' 연구하여 그에 상응하는 한자를 따오기보다는
가급적 기존에 있는 단어체계를 존중하는 쪽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어나 일본어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러나 최근들어
우리 사회 속에 유입되는 정보의 양이 폭증하면서
외국어를 굳이 번역하여 자국어체계 안에 편입시키기보다는
음소문자의 장점을 이용하여(한글이나 가나(假名)는 모두 음소문자)
외국어 자체를 (변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들여와
그 자체를 자국어체계의 가장 바깥외연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정치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는, 이른바 '양길승 몰카'사건은
개인적으로 언어적 관점에서 볼 때 색다른 느낌이 있다.
아시다시피 '몰래카메라'라는 말은
예전 '일요일 일요일밤에'라는 쇼프로그램에서
이경규가 연예인들의 의도되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던 꼭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SBS에서 박수홍이 진행하던 '스타 이런 모습 처음이야'라는 프로그램도 있었으나
아류작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법(技法) 자체를 제목으로 달았던 '몰래카메라'에 비해
언어적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TV쇼에서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몰래카메라'는 외국에서도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여서
서양권에서는 spy cam이나 voyeur, surveillance camera, peeping Tom 등의 말이 있고
(각각 다 뜻이 다름)
일본에서도 도둑촬영이라는 뜻의 盜撮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이러한 '첨단 사회현상(또는 풍속이라 해두자)'이
그 어떤 외국어로도 명명되지 않고
'몰래카메라'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명명되었다는 점이다.
.....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이라 함은
'몰래카메라'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몰래'는 고유어, '카메라'는 외국어)
신조어의 발생(發生) 자체가
기존 외국어들의 영향을 거의 완벽하게 받지 않은
드문 케이스라는 뜻이다.
만약 이경규의 '몰래카메라'라는 꼭지가 TV에서 방송된 적이 없는데
소형캠코더니 휴대폰카메라니 CCTV니 하면서
'몰래 감춰둔 촬영장비로 피촬영자의 동의 없이
그의 행동을 찍는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면
그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마 사회학이나 언론학 교과서에서는 외국의 이론을 직수입해다가 봐여르(voyeur)라는 원어를 쓰든지
'은폐촬영'이나 '피촬영자의 동의를 얻지 아니한 기망(欺罔)촬영' 따위의
알듯모를듯한 말을 만들어썼을테고
(대학교과서의 수많은 역어들이 우리에게 한번에 와닿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해보기로 하겠다)
이른바 인터넷의 포르노사이트들에서는
포르노 선진국 일본의 용어대로
'도촬'이라는 말이 그대로 쓰였을 것이다.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파파라치' 따위의 용어가
원어가 쓰이는 외국의 용례와는 무관하게 남발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파파라치와 몰래카메라는 다르지, 그치?)
그러나 이경규와 '몰래카메라'라는 일개(!!) TV쇼가 '태초에 계셨던' 덕분에
우리는 '몰래카메라'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그래서 우리의 의식구조에 가장 잘 들어맞는
멋진 신조어를 가지게 되었다!
이번 양길승 몰카 파문으로 인해
그 고고하신 정치인들 입과 신문/TV에서까지
'몰래카메라'라는, 그들은 (말하기가) 추잡해서 절대 쓰지 않으리라 여겼던 말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제 '몰래카메라'라는 말은
일반 서민들의 언어생활에 이어
높으신 상류층들에까지 '言衆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매스미디어에 의해 반복되고 또 반복됨으로써
(여태동안 이 '몰래카메라'라는 말의 사용에 대해 딴지를 건 매스미디어는 보지 못했다)
言衆이 내린 동의를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렇게 말하면 좀 변태취향이지만 암튼) 즐거운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
'몰래카메라'라는 신조어에 주목하고 싶은 이유는 그 造語방식에도 있다.
사실 부사는 한국어 체계 자체에서도 찬밥에 가까웠다.
인간(즉, 한국인)의 감정을 가장 직통으로 전달해주는 고유어 부사들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인들에게조차 금기시된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엄청, 몹시, 아주 같은 고유어 부사 대신
대단히, 굉장히 같은 한자어+'히' 형태가 더 많이 사용되어왔고
심지어는 베리(very)나 이빠이 같은 외국어 부사나
그것도 아니면 졸라, 열라 같은 욕설이 부사를 대체하는,
말 그대로 '부사들의 수난시대'를 우리는 목도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몰래카메라'라는 신조어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몰래'가
그동안 박대받던 부사들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당당히 자신의 造語力을 입증하는 개가를 올렸음을 인식해야 한다.
(부사는 수식/부속성분이라 이론적으로 명사신조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
이제까지 넘쳐나는 정보들을 명명할 때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직도입해온
우리의 언어생활을 고려해볼 때
'몰래카메라'의 승리는
다소 파격적이고 신선하게까지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신조어라면 외국어가 좀 들어가야하지 않나?'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이라든가
그 발생이 일개 TV쇼 제목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이 '몰래카메라'라는 자국내 자생적 신조어의 출신을
일부러 폄하하고 사장(死藏)시키려는 태도는
한국적 신조어의 발생, 더 나아가 한국어의 조어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현재 우리 언어생활의 외국어 의존성을 더욱 심화시킬 위험마저 안고 있다.
아마 '몰래카메라'라는 신조어는
YS시절 인구에 회자되던 '깜짝쇼'와 함께
부사가 들어간 자국내 자생적 신조어의 대표주자로 들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단어는 모두 '부사'+'외국어'의 구성마저 같다)
그러나 '깜짝쇼'의 경우는
한국적 정치상황에 특유한 단어였음에 비해
'몰래카메라'는 전세계적이고 21세기적인 보편적 사회현상(사회범죄)의
한국적 신조어라는 점에서
언어적인 측면에서 '깜짝쇼'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문/TV에서 '몰래카메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면 자주 등장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이처럼 한국식 신조어가 언중의 동의를 '굳히기'하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우리말의 조어력에 대한 의심과 패배주의를 걷어내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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