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3/05/20 15:11
4-1.
가독성은 '읽기 쉬운 정도'를 뜻한다. 여기에는 글자 자체의 갯수, 또는 글자 자체의 난이도에서부터 인간에게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방식의 유불리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을 수 있다. 가독성이 높아질 수록 정보에의 접근성은 높아진다. 나의 기본적인 입장은 '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동의될 때에만 이하의 논의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4-2.
우선 한글은 한자에 비해 글자 자체의 간소함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이점은 국한문혼용주의자들도 인정하리라 본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한자 많이 안다고 '나 많이 배웠지롱'이나 '나 잘났지롱' 하면서 뻐기려고 국한문혼용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그런 사람들은 한글만 사용함으로써 문자에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이러한 시도를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 정도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반대할 게 뻔하다. (부동산값 떨어지면 강남/서초에서 앓는 소리 내듯) 세종시대 최만리도 이런 부류 아니었을까?
게다가 '한자를 많이 아는 것'과 '가독성'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개개의 한자를 많이 알아도 단어로서 덩어리진 한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다시금 '한자해독'의 단계로 미끄러지고 만다.
요컨대 책이나 정보는 후딱후딱 읽어버려야지 글자 하나에 신경쓰며 '독서'가 아닌 '문자해독'을 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4-3.
또 한 가지 국문전용의 장점은 '어절' 단위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국한문혼용에 익숙한 윗세대들도 '습관' 차이일 뿐이라고는 했지만 '한자어 + 조사'로 한 어절을 두 번 이해하는 것보다는 어절 단위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편이 더 빠르고 경제적이다.
4-4.
어차피 이제는 한글쓰기가 우리 문자생활의 중심이다. (그러나 결코 대세론을 펼 생각은 없다) 따라서 기본적인 문서의 문자흐름은 한글이 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눈과 두뇌는 독서 와중에 앞으로도 계속 한글이 나오겠구나 하고 예측을 하고 일관된 문자해독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 흐름의 와중에 이질적인 요소(알파벳, 한자 등 외래문자)가 첨가되면 눈이 우선 피로를 느끼고 두뇌의 일관된 문자해독작업은 교란되기 마련이다. 특히 5만자에 이르는 한자 중 지금 눈이 보고 있는 한자가 어떤 것인지를 인식하는 작업은 뇌로서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행해지던 문자해독의 단계가 이질적인 외래문자 - 그것도 모양과 발음이 제각각인 한자 - 를 만나면 의식의 단계로 뛰어올라와 행해져야 하므로 그만큼 노력이 더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그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인 문자해독단계'를 포기해가면서까지 한자를 섞어쓸 필요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4-5.
기계화의 측면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학원컴실에서 제일 불쌍한 애들이 중국, 일본애들인데 매번 발음을 입력한 뒤 그에 따른 동음이의자 목록에서 원하는 글자(한자)를 찾는 노고(...)를 감수하고 있다. 한글? 알파벳 치듯이 다라락- 치면 글자가 완성된다.
일본인 애들더러 '그냥 가나(일본글자)만으로 쓰지 뭘 귀찮게 한자를 넣어치냐'라고 물어봤는데 그렇게 쓰면 절대 못 알아본단다. '발음'도 얼마 없고 글자 자체로서 불완전한 일본문자 가나로서는 한자를 반드시 빌어써야 하지만 한글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4-6.
마지막으로 가독성과 접근성의 문제는 아니지만 혼용론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동음이의어'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국문전용이 대세가 된 오늘날 국한문혼용론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논거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하다.
나도 동음이의어가 많은 단어들까지 한글전용을 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경우는 괄호( )로 한자를 병기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렇게 동음이의어의 한자를 밝히는 것이 언제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문맥 속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경우가 있다. (헉...)
때로는 '학문의 정확성'을 위해, 오로지 저자 자신의 심리적 만족(써놔야 직성이 풀리는...)을 위해 기어이 한자를 써놓고야 마는 경우도 없지 않은 듯 하다. 이런 경우들에까지 한자병기를 허용해야 하나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가독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라면 병기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은 괄호 쳐서 병기하는 것만도 상당히 시선을 흩뜨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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