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3/04/22 09:19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과 달리
독일어, 프랑스어 같은 서양의 많은 언어들은
명사의 성이 나누어지고
관사나 동사도 인칭, 시제, 격 등에 따라
복잡하게 변한다.
성년자의 외국어 학습이 100% 암기라고 할 때
(특히 아시아권의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관사변화, 동사변화 등을 외우는 것은
단어암기와 함께 무척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어암기야 외국어 공부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고
외우자마자 곧장 써먹을 수라도 있지만
관사변화, 동사변화는
한마디를 입밖에 내기 위해 머리 속에서 변신로봇 변신시키듯
머리 굴려가며 규칙 다 따진 뒤에야
간신히 어버버... 하게 만드니
외우기도 고통이요, 응용하기도 고통인 것이다.
(이런 '따지는' 단계 없이
'통째로 입에 익도록' 공부하는 게 낫다고야 하지만
누가 그걸 모르나?
그게 마음처럼 안 되니까
문법적으로 '따진' 뒤에 말하는 거지...)
2.
2인칭 단수는 -en 떼고 -st,
3인칭 단수는 -en 떼고 -t...
사실 언어란 것이 이런 규칙을 정해놓고
발생, 발전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예로 현대 한국어의 주격조사 '이/가'를 생각해보자.
(옛날 한국어에서는 '이'만 쓰였음)
'마님이'에서처럼 앞말에 받침이 있으면 '이'가,
'마당쇠가'에서처럼 앞말에 받침이 없으면 '가'가 사용된다.
우리는 이걸 자동적으로 구분해 쓴다.
심지어는 처음 듣는 낱말이라도
본능적으로 '이/가'를 저절로 알맞게 붙이게 될 것이다.
외국인이 이걸 배워서 써먹으려면
문법에서 배운대로 먼저
'음, 내가 말하려는 주어는 받침이 있으니까(없으니까)
'이'('가')를 써야겠군...'이라고
규칙을 따진 뒤에야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독일어를 말할 때
'몇인칭 단수/복수'를 따져 동사변화를 시키거나
'주격/목적격/소유격' 등을 따져 관사변화를 시키듯!
(하지만 내 생각으로 '이/가'의 문제는
조금만 써보면 발음상의 어울림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저러한 복잡한 '따지기' 단계를 뛰어넘어
외국인도 쉽게 입에 익힐 수 있으리라 본다.
즉, 이건 서양어의 동사변화와 같은 급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좀 복잡해졌지만
아무튼 앞서 말한대로 그러한 언어들의 문법적 규칙이란
- 외국어 학습에서 골치를 썩히게 하는 -
그네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의 규칙을
체계화한 것이다.
이걸 역으로 외워서 써먹으려 하니
어려운 건 당연지사.
3.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러한 '당연지사'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완전 백지상태의 어린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사물에 대한 인식방법이다.
얘기 한 토막.
주인집 꼬맹이들 중 제일 어린 두 놈은
요즘도 말 배우기에 정신이 없는데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 Native Speaker인 걔들도
문법적 관점에서는 틀린 말을 가끔 쓰기도 한다.
이거야 뭐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내가 가장 충격먹은 것은
3인칭 단수를 주어로 해놓고
-s 안 붙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거였다.
(이거 우리가 제일 처음에 배우는 문법 아닌가?)
서양어의 인칭에 따른 복잡한 어미변화에 질려있던 나에게
이 관찰은 꽤나 큰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백지상태의 어린이들에게도 이러한 어미변화는
'습득' 내지는 '학습'되는 성질의 것이라는 거다.
(뱃속에서부터 알고 나오는 게 아니란 말씀)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들과 얘기하고
어른들과 얘기하고 TV를 보면서
그들은 -s를 안 붙이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즉, 자신들의 언어를 규칙에 맞게
'교정'해갈 것이다.
문제는 이게 교정되면서
주체와 객체,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싹튼다는 거다.
동사어미변화가 거의 사라진 영어에서라도
그 애들은 적어도 3인칭 단수,
즉 '저기 혼자 떨어져있는 한 사람/물건'에 대한 개념을
달리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얘기다.
말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인식을 다르게 한다는 뜻이므로.
독일어는 어떨까?
같은 명사라도 남성, 여성, 중성을 나눈 뒤
그것이 주격이냐 소유격이냐 목적격이냐(목적격도 두 가지!)에 따라
관사를 변화시킨다.
인칭에 따른 동사어미변화는 더 복잡하다.
복잡하게 변화한다는 것은
사물을 그만큼 더 명확하게 분절적으로 인식할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말도 주격, 목적격, 소유격에 따른 변화체계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조사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대상물(명사)+격조사'의 덩어리가
우리 한국인이 주격, 목적격, 소유격을 인식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비롯하여
일본어와 중국어(얘는 어족이 다르긴 하지만...)는
서양어들만큼 인칭에 따른 어미변화가 복잡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나도 사랑하'는 거고 '너도 사랑하'는 거고 '그도 사랑하'는 거지
'ich는 liebe'인데 'du는 liebst'이고 'er는 liebt'인 건 아닌 거다.
4.
로마제국을 위협하던 야만족이나 쓰던 독일말이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고가 언어를 규정한다는 점에서는 필연이지만
언어는 자의적으로 생성/발전/소멸한다는 점에서는 우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작이 어쨌든간에
독일어를 비롯한 이러한 서양어의 인칭에 따른 어미변화는
그들의 사고, 즉 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역으로 형성시키는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를 했을 거라는 점이다.
서양문명이 인간과 자연을 대척점에 놓았던 것이다
서양철학이 주관론과 객관론의 오랜 줄다리기의 역사라는 것은
그들이 사고를 하면서 사용했던 그들의 언어가
역으로 그들의 사고를 지배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출발한 서양의 관념철학이
독일에서 제일 먼저 출발한 것도
복잡하기는 해도 정격(正格)에서 벗어나지 않는
독일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런지...?
5.
이글은 언어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 없이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인 내가
이곳에 온 뒤 느낀 작은 생각들을 연결지어보기 위해
끄적거린 것에 불과하다.
이글은 독일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언어의 비루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문자에는 우열이 있을 수 있지만
'말 자체'에는 우열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다만 두리뭉실하게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되는지에 대해
하나의 실례를 제시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시도가
논리적 결함 없이 잘 짜여진 것인지,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가설'에 불과한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기회가 된다면 앞서 언급한
vague한 명제('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수준을 넘어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계속 해나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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