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마음의 흔적들 2005/11/09 12:01
아부지한테 전화가 왔다.
낮에 일이 있어 이미 통화를 길게 한 상태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 전화를 받아보니
수화기 저 편에서 얼큰하게 취하신 목소리가 들린다.
건치과 김원장 아저씨랑 신촌에서 좀 드셨단다.
서울날씨가 10도 이하로 뚝-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추운 날씨에 신촌에서 기분 좋게 술 드시고 입에서 허연 김을 내시면서
아들놈한테 전화를 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좀 가슴이 짠했다.
.... 실은 얼마전에
집을 내 이름 앞으로 돌렸다.
그걸 받아서 신났다기보다는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다.
아버지의 퇴직금이 고스란히 들어간 '알토란' 같은 집인데
(이순자의 '알토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그 집을 아들한테 넘긴다는 게 아부지한테 얼마나 큰 상실감일까, 뭐 그런 생각.
그래서였나
아부지는 수화기 너머로 계속
'야, 이놈아...니, 니네 부모한테 잘해야 돼, 이놈아...'
이런 말을 두세번 반복하셨던 것 같다.
......
충남 연기군인가...
최근에 그곳의 부모를 찾는 자녀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었단다.
안부전화도 자주 하고...
'효(孝)도 돈 있는 곳에 난다' 라는 말도 돈다고 한다.
그런 말들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무장갑을 끼고 받은 전화 너머로 들리는
아부지의 얼큰한 목소리에 짠했던 내 마음이
정말 자식으로서 늙어가는 아비를 보는 순수한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이제 받을 것은 다 받아 챙긴 속된 자의 여유로운 측은지심이었는지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그냥 이런 그림들이 생각났다.
아부지...하면 항상 떠오르는 그림들.
서울 변두리 살 때,
집 뒤에 있던 개천 둑길을 따라
엄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빙긋이 웃는 표정으로 페달을 밟고 전철역까지 출근하던
풍경화 같은 모습.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시던 아부지가
어느 목요일 저녁, 일찍 들어오셔서 나와 내 동생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나가시려던 모습.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가 물으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항상 '엄마!' 소리를 할 정도로 아부지를 생각하지 않던 우리가 느낀 어색함과 달리
아부지는 그날 우리와 함께 산책을 나가시면서
우리가족 날적이 수첩에 엄마 앞으로
'남자들끼리만 데이트하러 가서 미안합니다'라고 적으며 또 빙긋이 웃으셨다.
나는 그때 그 구절을 보면서
아부지의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세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 아부지의 '서툴고 세련되지 못함'은 비단 문장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아부지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또하나의 장면.
국민학교 2학년 때였나... 수업 끝나고 신나게 집으로 달려왔는데
대문이 열려있어 이상하다 싶어 현관으로 들어서니
할머니가 펑펑 울고 계셨다.
할머니 손에 들린 건 몇개월전 리비아 건설현장으로 가신 아부지의 첫 편지였다.
한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할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이 어색해서
나는 등에 맨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채로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괜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던 것 같다.
......
일본의 어느 수필가였나.
늙은 어머니를 업고
그 가벼우심에 펑펑 울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 역시도 한달에 한 두번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눈에 띄게 늙어가는 아부지의 모습을 보고 괜히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가끔 집에서 가볍게 술을 드시면
그제서야 정치얘기를 화제로 삼아 나와 싸우시곤 하는데
논리적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음에도 나와 굳이 정치얘기를 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사실은 내가 정치얘기를 할 때 가장 날카롭고 말이 많아진다는 것,
그래서 아부지가 원하는 것은 사실
아부지와 나 사이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The Great Debate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똑똑하고(똑똑해보이고) 말 잘하는(말 잘하게 보이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싶어하시는 거라는 걸
나는 몇 년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설령 자기 자신이 아들에게 논리적으로 공박을 당하고 허물어져도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아들의 강력함을 보고 기꺼워하고 싶어하는 아비의 마음이라는 것은
갓 태어난 제 새끼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거미를 닮았다.
거미도...외로울까...?
http://morehj.com/blog/trackback/470
그래서 아버지 친구분들이 던지시는 "니놈이 애비보다 낫구나."라는 말을 아버지들은 기다리시는거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