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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서 매일 같이 묵주기도를 올리던 엄마가
갑자기 방 안의 할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버님, 기도하실 때 누구를 위해 기도하세요...?

할아버지는 그 질문을 잘 이해 못하셨는지
그냥 기도책에 있는대로 하신다고 하셨다.

아니요, 기도 지향을 누구를 위해서 하시느냐구요.

아, 그거... 그거야, 죽은 네 어머니(시어머니)를 위해 하지.

....그러면요, 앞으로는 자식들을 위해서도 하세요,
호주에 있는 삼촌들, 고모들... 그렇게요...

TV를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엄마가 왜 저런 질문을 하나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엄마와 할머니는
기도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를 하곤 했으므로
별로 신경쓰지 않고 다시 TV에 눈을 돌렸다.

그날 저녁 밥을 먹다가
식탁에 함께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아버지, 방에 계셔...?

아뇨, 이 앞에 잠깐 나가셨나봐요.

그럼... 얘는...? (나를 가리키시며) 얘, 알아도 되나...?

그쵸... 이제 얘도 다 컸는데...

그런 분위기...
TV뉴스에서 '오늘 오후 5시 30분경...' 같은 코멘트가 나오면
뒤의 상보(詳報)를 듣지 않더라도
그게 대형사고가 터졌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식탁 위의 그 이상한 기운은
밥을 먹던 나의 뒷덜미를 갑자기 서늘하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시는 말,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 순간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이 그냥 현실이 아니기를 무턱대고 바랬던 것 같다.
그런 유치한 바람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는 무관심하게 내 귀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호주의 막내삼촌 있잖아...? 췌장암이래...

.........

나는 밥을 어떻게 먹었을까.

기껏 물어본다는 게
'일찍 발견한 거 같은데... 괜찮은 거 아니에요...?' 였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리 속은
경망스럽게도
아직 10년은 더 자라야 할 내 동생들과 숙모를 걱정하고 있었다.

글쎄... 요즘 살이 좀 빠지고 해서 진단을 받았대나봐.
5개월전에 검사 받았을 때는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이번에 검사를 해보니 간까지 퍼져있었다던데...
내일 모레 정밀진단을 하기로 했다니까...

.....

막내삼촌은 언제나 튼튼했다.

매달 우리가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를 사오면
독고탁 만화만 보고 주겠다고 냉큼 뺏어가던 대학생 때부터
삼촌은 우리집에서 제일 크고 제일 힘이 셌다.

우리집에 인사 왔을 때 어린 마음에도 내가 '참 곱다'라고 생각했던 숙모와 결혼한 직후
큰삼촌이 있는 호주로 이민을 갔을 때
할머니는 펑펑 우셨는데
그 뒤로 삼촌이 할머니의 모습을 본 것도
내가 삼촌의 모습을 본 것도
재작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민간지 15년이 지나서였다.

캐나다에서 돌아오기 이틀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삼촌은 내가 오기 하루 전에 이미 한국에 들어와있었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 발인을 위해 2층 내 방에서 내려왔을 때
1층 마루 소파에 앉아있던 막내삼촌의 모습은
마치 영화에서 카메라가 주인공의 모습을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며 잡듯
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까만 피부는 여전했지만
15년전 두줄 츄리닝을 입고 우리와 태권도를 하던 3남 2녀의 막내삼촌의 모습은 없고
희끗한 머리에 큰 검은 양복을 입은, 풍채 좋은, 세 아이의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그 달라진 모습에 나는 빨리 적응해야 했고
이제는 삼촌과 장난을 치지는 못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1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내 기억 속에 남은 삼촌의 마지막 모습은
숙모와 큰 가방 몇개를 밀며 김포공항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 뿐이었는데...

중간이 텅 비어버린 나와 삼촌의 15년은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순간부터
왠지 다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던 거다.

.........

작년, 호주에 갔을 때
퍼스 여행을 마치고 시드니로 옮겨와
작은삼촌집에서 지냈다.

사진으로만 보던 세 동생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들은
오히려 막내삼촌이 했던 말들이다.

삼촌, 여기 와서 고생 많이 했다...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겨주신 게 뭐가 있나, 그냥 몸만 온 거지...

한국에서는 서른 이전에 자리 잡지 않으면 힘들지, 사회구조가...
그래도 여기서는 어느 정도 벌면 어느 정도 살게 돼...
여기서는 삼촌처럼 셋씩 낳아도 돈 걱정 없이 그럭저럭 살 수 있어...

나와 동생을 차로 이동시켜주면서 삼촌이 흘러가는 말로 했던 얘기들,
또 저녁을 먹은 뒤 과일을 먹으며 거실에 앉아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들,
창 밖으로 시드니의 풍경을 무심히 보면서도,
TV에 나오는 심슨가족을 동생들과 헤헤거리며 보면서도,
그 말들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막내삼촌이
중간이 텅 비어버린 15년전 우리와 잘 놀아주던 개구쟁이 삼촌의 모습이 아닌
점잖은 어른이라는, 내게는 다소 낯선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라는 삼촌의 모습들이
삼촌의 말과 함께 깊이 머리 속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

작은 정원과 뒷마당이 있는 예쁜 집,
각각 점잖고, 활달하고, 예쁜 두 아들과 딸 하나.
남의 것을 욕심냄 없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가기에 부족함 없는 안정된 사업.

이제 막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으려는 막내삼촌에게
하느님은 그 작은 행복을 거두고 시련을 주시려는 것 같다.

하지만 몇번을 생각해봐도
나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라는 결론밖에 얻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막내삼촌이어야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건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정말 '아직은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2005/10/05 02:38 2005/10/0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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