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새로운 경험들 2005/08/17 11:50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데 적잖이 흥분이 됐다.
하루종일 사파리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정표에는 수요일 일정이 가장 짧게 나와있지만
가장 짧게 기록된 그 일정이 사실은 가장 긴 일정인 거다.
아침 7시부터 차에 올라 마사이 마라 종일 관광에 돌입했다.
앞서 말했듯이 마사이 마라는 케냐쪽 지명이고
인접한 탄자니아쪽 영토는 세렝게티라고 한다.
암보셀리, 나꾸루와 달리 이곳은 우리나라 대관령 목장 같은 고원의 초지(草地)다.
'사파리'하면 떠오르는,
광활한 사바나 초원을 끝없이 지프로 질주하며 동물들을 쫓아가는
그런 스피디한 느낌은 가질 수 없지만
동물들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접할 수 있어 좋다.
'사파리'라는 말이 스와힐리어로
'가서 무엇인가 보고 배워온다'라는 뜻이라는데
아마 마사이 마라는 이러한 사파리의 어원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보호구역 내를 가로지르는 마라강 덕택에 동물들의 개체수도 많다.
특히 지금(8월)은 동물들이 남서쪽 탄자니아에서 북동쪽 케냐로 이동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어 행운이라는 것이 여행사의 설명이었다.
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수요일의 일정은 그다지 말로 설명할 게 없다.
사진을 보도록 하자.


**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느낌이 들어 진지해졌다.
한참 돌다 보니 조지가 언덕 위 어느 표지석 앞에서 차를 세운다.
케냐와 탄자니아의 경계석이란다.
위가 좁고 아래로 갈수록 넓은 형태의 삼각기둥이다. (삼각뿔대라고 하지)

제국의 논리로 그어진 일직선의 인위적인 경계들은 지도상에서만 존재한다.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뜻의 자연(自然)은
그러한 '너와 나'를 가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며칠전에 본 케냐 - 탄자니아 국경의 삼엄한 검문소 모습과
평원 위에 덩그러니 하나 놓여진 표지석의 모습은
'경계'에 대한 인간과 자연의 자세를 대비하여 보여주는 듯 하다.


앞서 말했듯이 마사이 마라 안에는 마라강이 흐른다.
터줏대감인 악어와 하마가 강물 안에서 꿈쩍도 않고 쉬고 있다.
운이 좋으면 소나 누떼가 강을 건너다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강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룹당 1명씩 붙는 무장군인들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
현역 케냐군인들인데, 우리 담당자는 AK47을 메고 있었다.
AK47 실총을 처음 봤는데, 예비군훈련 때 보는 M16과는 다른 매력을 실감했다.
실총이기 때문에 모서리마다 은색이 드러난 것이 아주 준수해보였다.
(솔직히 AK47에 정신이 팔려서 마라강은 잘 신경을 못 썼다. ^^;)


점심시간이 되어 보호구역 막사 앞으로 모였다.
마라강 다리 북단에 설치된, 검문소를 겸하는 곳인데
종일 마사이 마라 관광을 해야하는 관광객들이 도시락을 먹기에 안전한 곳이다.
하지만, 그늘이란 그늘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점령한 뒤여서
우리는 조지와 함께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그 넓은 평야에 마땅한 곳이 있을리 없지.
얼마 돌다가 그냥 그 자리에 내려 도시락을 까먹었다.
역시 샌드위치, 과일, 스낵 등으로 이루어진 '사파리 도시락'이었는데
어디선가 사자가 튀어나올까봐 조금 먹다가 냉큼 차 안으로 다시 튀어들어왔다.
조지랑 필중이는 잘만 먹더군...^^

식사를 하고 마라강을 따라 또 이동했다.
어제 여행사 사장님이 운 좋으면 누떼가 강 건너는 거 보실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아니나다를까, 정말 끝도 없이 늘어선 누떼가 강가를 따라 이동 중이었다.
레밍떼를 연상시키는, 아니 그것과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장관이었다.
잠시 차를 멈추고 그들이 강둑을 내려와 강을 건너길 기대했지만
그들은 강을 건너진 않고 계속 강가를 따라 이동하기만 했다.
강을 건너는 모습, 악어가 그들을 공격하는 모습 같은 것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소규모 단위로 모여있는 누'들'만 보던 우리가
말 그대로 엄청난 규모의 누'떼'를 봤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차의 시동을 거니
이번에는 저 멀리서 '코끼리떼'가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미 암보셀리에서 코끼리 가족과 스쳤던 인연이 있지만
평지가 아닌, 초록빛의 고원지대에서 만나는 코끼리들은 또다른 느낌이었다.
저 멀리 능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와 이쪽 능선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코끼리들의 모습은
잘 꾸며진 카바레나 뮤지컬 무대에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여유롭게 등장하는
'배우'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들에게는 마사이 마라의 초록평원과 푸른 하늘이 조명이고
맑은 강물과 시원한 바람소리가 박수소리였을 테다.
방향을 틀어 다른쪽 능선을 올라가다가 아차, 또 펑크가 났다.
그래도 몇번 차 멈추고 수리하고 하니까 이젠 그러려니 싶어 여유가 있다. ^^;
내려서 사진 몇 컷 찍었다.



다행히 타이어 교체할 동안 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에 오르니 이제는 왜 사자가 안 나오냐며 속으로 툴툴거리게 된다.
벌써 시간은 오후 2-3시를 넘었는데...
일정표에는 종일 마사이 마라 돌면서 빅5를 관광한다고 나와있는데
정작 마사이 마라보다는 나꾸루가 더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아쉽다.
그때 조지가 또 차를 몰고 언덕을 올라간다.
아까 무전기로 뭐라고 가이드들끼리 얘기를 하더니 뭔가 발견했나보다.
하하... 키 작은 나무 밑에 암사자들이 코~ 자고 있었다. ^^;


우리 말고도 몇대의 차량들이 모여들자 엎어져 자고 있던 녀석들이
뭔일났나 싶어 몸을 일으킨다.



암사자 두 마리의 재롱 아닌 재롱이
마사이 마라 종일 관광을 한 수요일의 마지막 이벤트였던 것 같다.
이후로는 숙소로 돌아왔으니까.
숙소로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고 기념품들을 쌌다.
그때까지 낡은 비닐봉지에 대충 넣어갖고 다니던 기념품들을
하나하나 종이로 되싸서 꼼꼼히 포장한 거다.
내일 나이로비 가는 길은 올 때처럼 덜컹거릴테고
그렇게 되면 파손되기 쉬운 공예품들이 위험하다.
비행기 안에서 가져온 케냐항공 기내잡지를 뜯어가며 하나하나 다시 포장하고
타이트하게 비닐 안에 담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무튼 마사이 마라 종일 관광은 생각보다 조금 김빠졌다.
기대감이 컸던 이유도 있고,
동물들을 보기 위해 너무 긴 거리를 이동하며 지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훑어보고 있노라니
팔을 간지럽히던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무심한 듯 사람들의 시선을 흘려보내던 평화로운 동물들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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