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새로운 경험들 2005/08/13 11:48
아침 10시 방콕행 비행기다.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싸들고 아버지 차를 이용해 인천으로 이동했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고... 필똥이가 눈에 밟힌다.
케냐에 가도 우리 필똥이처럼 예쁜(능청스런!) 강아지는 없겠지...하면서.
인천공항에서 변우재한테 전화를 하니 도통 안 받는다.
공항버스 안에서 자고 있겠거니 생각은 하면서도
혹시 집에서 퍼져 자는 게 아닌지 쬐끔 의심이 들었다.
툴툴 거리며 어슬렁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비행기 안에서 자려고 밤새 mp3 플레이어에 mp3 녹음했는데
이제 보니 하나도 저장 안 되어 있다며 뾰루퉁해있다. (귀여운 것...)
그러나 우재의 시련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책이나 읽어야겠다"
주섬주섬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서 보여주는데 '노르웨이의 숲'이다.
"회사 자료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빌려왔지"
"이거 안 읽었냐?"
"상실의 시대나 뭐 그런 건 읽었는데... 이건 모르는 거라서..."
"상실의 시대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인 거 모르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은 한국에서 붙인 건데..."
말이 없는 녀석...
많은 여자들이 성실한 남자를 섹시하다고 하지만
가끔 이렇게 보면 귀여운 면도 있단 말야, 자식...
"어쩐지... 주인공 이름이 같더라..."
다시 가방 속에 책을 집어넣는 귀여운 녀석.
'나이로비'를 끝끝내 '나이비로'라던 공항 티켓팅직원을 뒤로 하고
이래저래 짐 검사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난생처음 타본 비즈니스석은 자리도 넓고 식사도 맛나고 아주 좋았다.
다들 맛 없어 못 먹겠다는 기내식이지만
나는 비행기 기내식을 무지 좋아하는데
이 타이항공 비즈니스석 기내식은 더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연어로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메인디쉬가 나온 뒤 디저트까지.
막판에 표를 못 구해 추가비용 부담하며 타게 된 비즈니스석이었지만
본전 뽑자는 각오로 기내식, 오물오물 맛나게 먹었다.
방콕행이지만 홍콩에 잠깐 기착하는 비행기다.
홍콩에서 잠깐 손님 바꾸고 기내청소한단다.
1시간이라 밖에 나가기도 애매하고... 바로 앞에 있는 면세점 가서 이것저것 본다.
나랑 동생은 그냥 심드렁... 있는데
성실한 우재는 mp3 플레이어와 '노르웨이의 숲' 때문에 붕 뜬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듯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샀다.
이미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에 영문판을 읽는데는 문제가 없을 거란다.
영어에 쥐약인 나로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커어...
홍콩에서 방콕까지는 2시간에 불과하다.
동생은 자고 나는 개인용 TV 이것저것 눌러보고 우재는 '연금술사'를 펴들었다.
이때 흘러나오는 우재의 낮은 신음...
"번역본하고 내용이 좀 다른데...?"
그렇다.
우재가 산 책은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아니라 '11분'이었다.
왜... 외국책이나 영화 보면
'xxx의 작가 xxx의 신작 xxx' 뭐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잖아.
우재가 산 책의 표지 역시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루 코엘료 - 11분'
이렇게 되어 있던 거지.
이쯤 되면 아무리 친구가 귀엽다손치더라도 안쓰러움이 들기 마련이다.
결국 우재는 책을 덮고(6달러나 주고 샀는데~~) 나처럼 TV를 봤다.
그 짧은 홍콩 - 방콕 2시간 동안 한번의 기내식을 더 먹었는데
메뉴판을 가만히 보아하니 웃긴 걸 발견했다.
아까 먹은 게 계란국수, 닭고기 중 택1 뭐 이런 식이었다면
이번 거는 계란밥, 닭국수 중 택1 뭐 이런 식인 거다.
인터넷에서 본 '자취생을 위한 라면요리 60가지' 뭐 이런 게 생각이 났지만
들뜬 여행길에 이런게 무슨 대수일 쏘냐.
맛나게 또 기내식을 먹어주고 방콕에 내렸다.
여기서 10시간 정도를 기다렸다가 밤 11시 비행기를 타야한다.
8박 9일이라지만 앞 뒤 하루씩은 완전히 이동만 하는 날이니까...
10시간 동안 면세점 구경하는 일도 꽤 지겹다.
우리 같은 환승자들을 위해 4~5시간 방콕시내 관광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돌아올 때 하루, 방콕여행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굳이 나갈 필요는 없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참 다양한 사람이 많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간에 있어서 그런지
유럽, 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사람이 모두 섞여있어 재미있더라.
하지만 싱가폴만큼 환승자들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있는 것 같진 않았다.
싱가폴 창이공항은 쾌적하고 오락거리도 많고 좋던데...
어디선가 왁자지껄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가보니 웬 단체로 T셔츠를 맞춰입은 사람들이
공항 로비에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있다.
한국에서 온 교회사람들인데 그 수가 엄청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인도로 선교가는 와중에 방콕에 들른 거란다.
그런데 남의 나라 공항에서 굳이 그렇게 예수~ 예수~ 하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래야 하나?
나와 동생이 보기엔 공항에서 양말 벗고 고스톱 치는
어글리 코리안과 별반 다를게 없어보였다.
춤과 노래가 끝나자 그 많은 사람들이 몇몇씩 짝을 지어
인도사람들에게 접근해 선교를 했다.
우리나라 대학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성경말씀 적힌 작은책자 들고 '같이 읽어BoA요~' 하는 그런 거 말이다.
인도에서 한달간 '살다'온 동생 말에 따르면
해외여행을 하는 인도사람들은 인도에서도 계급이 높고 부자여서
기독교와는 별반 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굳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같이 성경 읽자고 하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개신교의 선교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던 터였지만
외국공항에서 단체로 그러는 걸 보니 참...
(이것 때문에 우재랑 좀 투닥거렸다)
그래도 시간이 늦어지니 그들도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 셋도 슬슬 배가 고파졌다.
태국에 왔으니 태국식으로 먹어보자! 하고 태국식당을 찾는데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공항 3층에 넓고 좋은 태국식당이 하나 있더라.
인스턴트식 기내식과 달리 제대로 된 저녁을 먹으니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태국식당 가서 양식 시킨 나는 또 뭐냐)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기분 좋게 나이로비행 티켓팅을 하려고 보니
어엇... 홍콩의 기상악화로 나이로비행 비행기가 오지 못하고 있단다.
나이로비로 가는 마지막 난관이었다.
(케냐 가는 길이 이렇게 험하고 고될 줄이야...)
30분 있다가 다시 티켓팅창구로 와달라는 A4용지 안내문을 하나 써붙여놓은채
티켓팅창구의 태국여직원은
생글거리며 옆자리 동료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흑...
그래도 하느님께서도
돈 들여 방콕까지 왔는데 케냐, 그까이꺼 갔다와라~ 싶으셨는지
다행히 나이로비행 비행기 티켓팅이 재개되었다.
(출발시각은 23시에서 00:45로 변경)
티켓을 끊고 들어가기 전에 피로를 풀자며
셋이서 잠깐 30분짜리 태국 발맛사지를 받았다.
좁은 공간에 일렬로 일곱명의 손님이 누워있고
발치에는 푸른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태국여인들이 손님들의 발을 맛사지해줬다.
글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6, 70년대의 여공들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즐거운 여행길에 굳이 그런 생각이 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이 쉬 지워지질 않아 가볍게 맛사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맛사지하는 사람 솜씨가 형편없었던 건가? 흥...)
어쨌거나 티켓을 들고 이젠 정말 안으로 들어와 탑승구 앞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주변에는 어느새 검은사람들만 보였다.
그들을 보니 이젠 정말 내가 케냐에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들떴다.
그런 그들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했으니
그때 내 모습을 본 흑인이라면
저 노랑둥이가 왜저리 실없이 웃고 있나...하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비행기 탑승시간은 예정보다 늦어진 00:45.
이미 토요일은 지났고, 케냐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일요일인 셈이다.
금요일저녁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졸릴만도 하건만
케냐항공 비행기에 올라 흑인승무원들을 보고 있으니
졸리움 대신 모든 게 새롭고 이색적인, 들뜬 기분 뿐이었다.
빨간색 조끼를 입은 검은피부의 승무원들.
(물론 탑승객의 절대다수 역시 흑인들이었다)
가장 강렬한 두 가지 색, 빨강과 검정이 엮어내는 선명한 빛깔,
사슴을 닮은 듯 늘씬하면서도 탄력있어보이는 승무원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채
나는 그날밤 케냐 초원을 신나게 달리며 사자를 좇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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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분의 활약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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