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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1~2백명 뽑을 때 사법시험 합격했던 누군가의 합격수기를 보면
처음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는 자신도
'사회정의'와 같은 낭만적인 생각으로 도전해보리라 하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시험공부에 돌입하면서부터는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상(理想)만으로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겨내기가 불가능함을 금세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그 사람은
'이 시험은 하나의 관문일 뿐이다.
이 시험은, 넘지 못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노는 것이건 뭐건간에)을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러한 관문일 뿐이므로 기필코 넘어야한다'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매진했다고 한다.

사법시험 공부하면서
'사회정의' 같은 원대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해서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 법조인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저 사람이 지금
어떠한 모습의 법조인이 되어있을까 무척 궁금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현재 모습이
고시생 시절 가졌던 목표의식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

김훈이 시사저널 편집장을 하던 시절에 한겨레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위악적인 모습을 많이 드러내어 사람들을 당황케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5공 초기 전두환 찬양가를 신문에 썼던 건 나였다.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던 거다'

'나는 문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녀차별이 분명한 사람이다' 등등...

한때 박래부와 함께 한국일보에 문학기행을 연재하며
수많은 문학도들에게 감탄과 또 동시에 좌절을 안겨주었던
천재적인 문필가를 인터뷰하려던 한겨레의 취지와는 다르게
이런 글이 나가자 시사저널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시사저널의 한 기자는
그에 대한 반발로 사표까지 썼단다)

성격상 '떠밀려서' 내진 않았겠지만
일이 커지면서 김훈은 주장글(?) 하나 써갈기고
홀연히 시사저널에 사표를 내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 글에 보면,
자기가 남녀차별주의자이고 강자의 논리를 숭상하지만
시사지의 편집장으로서 있을 때는 결코 자신의 개인적 기호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러한 얘기가 나온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구질구질한 글도,
왜 날 이해 못해주냐며 세상을 향해 분통 터뜨리는 독기 품은 글도 아닌,
'못다한 부분에 대한 부연과 담담한 피력'에 가까운, 자유인인 그다운 글이었기에
'개인으로서의 김훈과 시사지 편집장으로서의 김훈이 혼동되지 않도록 살아왔다'라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갔다.
(어느 신문 K고문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믿음이 갔을까)

...........

사무실에서 피곤한 일들이 많았다.
주로 '전화받기'에 관한 일들이었다.

'왜 나는 아는 걸 저 사람들은 모를까'
혹은 이보다도 더 심한 생각들까지도.
하지만 그들 앞에서 '그것도 모르세요?' 같은 말을 하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손 놓은 애들을 보고
'왜 수학을 모르지?'라고 의아해하던 모습 속에
약간의 자만심이 섞여있었던 것을 고백한다.
그렇게 자신감에 차있던 내가 대학에 와서 형법총론을 보고 암담함과 아득함을 느꼈을 때,
그 모습이 바로 1년전, 수학책을 앞에 둔 그애들의 모습과 같았으리라.

결국 내가 가진 지식과 지능, 지력이란 건
남들보다 조금 뛰어나긴 하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자만할 성질의 것도 못된다는 거다.

그렇게 내가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하는 것들을
그냥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 정도로 생각하려 한다.
내게 '주어진 것'이지, 내가 '가진' 것이 아닌 바에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을 업수이 여길 자격은 내겐 없겠지.

그래도 나도 인간인 이상,
정말 전화받기 피곤하고 곤란할 때마저도
저런 낭만적이고 천사 같은 생각은 갖지 않을 거다.
괜히 걸맞지도 않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거 고수하다가
스트레스 표출마저 억제하고 살진 않을란다.

하지만 맨 위에 얘기했던 고시생이나 김훈처럼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낼 거다.
전화통 내려놓는 순간 화장실에 가서 씨발씨발 욕을 하고 푸는 한이 있어도
전화통 붙잡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수화기 너머의 내가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걸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악랄할 정도로 친절하게 자근자근 잘 받아줘야 하는 거다.
2005/06/15 01:32 2005/06/15 01:32
http://morehj.com/blog/trackback/419
qus  | 2005/06/15 10:59
너처럼 꼼꼼한 성격이라면, 전화받기의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한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 놓는 게 어때? 그리고 기계적으로 받는 훈련을 하는 거야.. 혹시 알어? 잘 만들어 놓으면 회사에서 쓸 수도 있고 보너스라도 받을지 ㅋㅋ
  | 2005/06/15 11:34
전화받을 때 매뉴얼 펴놓고 순서도대로 되냐...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하는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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