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머리의 고민들 2005/02/21 13:48
젊은 후배의 혼례식엘 갔다 왔다. 신랑은 씩씩했고, 신부는 아름다웠다. 한 해 가운데 가장 을씨년스러운 철이 아마 11월일 터인데, 두 젊은이의 생기를 엿보고 나니 내 둘레 11월 풍경에도 어쩐지 윤기가 흐르는 것 같다. 야윈 햇살과 소슬바람이 되레 살갑고, 달착지근한 우수(憂愁) 속에서 내 몸은 간질간질 파닥거린다.
젊은 후배의 혼례를 지켜보며, 내 몽상은 사랑의 현상학으로 치달았다. 몽상은 과학정신이 가르쳐준 사랑의 생물학적ㆍ사회학적 기원을 저 좋을 대로 건너뛰고, 낡아빠진 형이상학적 이상태(理想態)의 수면에 물장구쳤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 나는 느닷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언술을 떠올렸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놋쇠나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되뇌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제일 큰 것은 사랑”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로가 설파한 이 사랑이 너무 가파른 사랑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라고 잘난 바울로는 주장했지만, 이 위대한 사랑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연인 사이의 사랑은 그런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흔히 ‘낭만적 사랑’이라고 불려온 사랑, 곧 한 사람의 짝은 오직 하나이고 그것은 우주가 생겨날 때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눈먼 사랑일 것이다. 넋에 대한 믿음 없이는 빠져들기 어려운 이 낭만적 사랑은 연애의 현대적 편의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겠지만, 그것의 상상 없이는 연애의 아우라가 존재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 낭만적 사랑은 또 마땅히 편애를 지향해야 한다고 나는 내 젊은 후배의 혼례식장에서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려도 나만은 그를 지키겠다는 편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를 따돌려도 나만은 그녀를 감싸겠다는 편애 말이다. 결혼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제 편’을 만드는 의식이 아닐까?
공심(公心)에 앞서는 사감(私感)은 공동체에 해롭게 마련이지만, 연인끼리의 이기주의만은 예외일 수 있다고 나는 속삭였다. 그 맹목적 편들기, 그 눈먼 역성이야말로 연애를 연애로 만드는 바탕이기 때문이고, 그런 상상된 낭만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아름다운 약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신랑처럼, 내 젊은 후배도 제 아름다운 신부와 혼인서약이라는 것을 했다. 이런 엄숙한 의식은 서약이 사랑보다 강하다는 오래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사랑을 철석 같은 서약으로 붙잡아두려는 인간의 지혜가 거기 있을 터이다.
나는 그러나 편애로서의 사랑은 서약보다 힘세다고, 힘세야 한다고 내 젊은 후배의 혼례식장에서 생각했다. 서약보다 허약한 사랑이라면, 서약 없이는 흔들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모든 진지한 연인들의 상상적 관계인 낭만적 사랑에 미달하는 감정일 것이라고 나는 우겼다.
나는 내 젊은 후배와 그의 아름다운 신부가 서약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묶이기 바란다. 자연이 조락 속에서 은성(殷盛)의 자취를 잃으며 움츠러든 이 11월에 내게 한 움큼의 생기를 베푼 이 두 젊은이가 서약보다 질긴 편애로 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바란다.
반드시 그것이 좋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드문 일이어서다. 내 둘레의 누군가 한두 사람쯤은 그런 드문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11월의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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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글은
새색시처럼 수줍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아름다운 문체(껍데기)와 달리
공인된 자유주의자(또는 게으름뱅이?)로서 그의 글 내용(속)은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쪽의 자유주의적 흐름에 닿아있어
무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고전 또는 보수'로 치환해버리고 마는 한국사회에서
글의 껍데기와 속이 빚어내는 신선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고종석의 유럽식 자유주의 태도를 인지하면서도
가끔 들었던 삐딱한 생각은
이 양반은 과연 종교와 사랑 같은 고전적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물론 그가 가진 종교에 대한 태도야...
그의 많은 글로부터 이미 추론 가능한 것이었지만
종교와 마찬가지로 서양이성의 틀에서 보기엔 비논리적/비합리적 영역이면서도
종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그만큼 또 현세에도 절박한 '현재진행형의 문제'인 '사랑'에 관해서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이 11월의 글에서
나는 고종석이라는 사람이
복거일이나 공병호 같은 '돌격대형 자유주의자'와는 다르게
그래도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이 살아있는,
다시말하면 스스로를 훼절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을 자기 신조의 영역 안에서 너그러히 인정할 줄 아는
조금의 여유를 갖춘 자유주의자(이 말이 보여주는 엄청난 모순!)라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지어올릴 수 있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그러한 사람이다.
http://morehj.com/blog/trackback/384
당신은 '새색시처럼 수줍은' 과 같은 표현을 잘 구사하지... 당신 마음에 썩 드는 모양이야... 후훗~
퇴근이나 해야지... 에혀~
퇴근이나 해야지...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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