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새로운 경험들 2002/08/31 06:27
한달 와서 뭐가 어떻다 하는 것은 유치한 일일 수 있지만
원래 인간 자체가 유치하므로 그냥...^^;
졸업을 코앞에 두고 갑작스레 여기 온 것은
숨막힐 듯한 한국사회 속에서 잠시 이탈하여
좀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보고자 했던 이유가 컸다.
그런 초기의 목표는
상당부분 여기서 들어맞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다.
이곳에 왔을 때 무척 놀랐던 것은
이곳 사람들이 생(生)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피부색이 어떻든, 생김새가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그리고 무엇보다 '월수입'이 어떻든간에
그들은 주5일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산으로 들로 또 열심히 놀러다녔다.
땅덩어리가 넓은데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져서 그렇겠지만
이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식은
한국과 일본사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게
'움직임'이 가미된 것이었으며
진정한 '나'로서의 의미는
바로 그 토, 일요일 - 주말에 발현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자 하는 듯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단순히 등산이나 레저활동뿐만이 아니라
유물에 관심이 있으면 박물관으로,
동식물에 관심이 있으면 동식물원으로
그들은 자신의 주말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 일각에서 불고 있는
주5일제 도입을 찬성하기에 이르렀다. ^^;
다만, 한국사회에 주5일제가 도입될 때 우려되는 점은
1. 일할 때도 껄렁거리는 한국사회 직장문화가
근로일수 축소와 맞물려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과
2. 여태까지 직장에(남자), 가족에(주부) 매여
'자아'란 것을 잊고 산 한국인들이
이틀에 걸친 주말을 통해
그동안 퇴화되었던 '자아'에 대한 발현욕을 다시금 재생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는 점,
3. 그리고 2.의 문제에 덧붙여
주2일 휴일이 자칫하다가는
'고속버스에서 술먹고 지루박 추는
시골부녀회 야유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현재 여가문화로
거듭 채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 등이다.
........
이곳 사람들이라고 해서
껄렁껄렁한 인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 자체는 대단히 건강해보였다.
운동이든, 모형이든, 학문이든, 성(性)이든간에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아무도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는)
'위선'의 음습함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난 김대중, 전라도 새끼가 싫다'고 말하지 않고
'국가정체성이 어떻고 태극기가 어떻고'로 시작하여
'이 정권은...'으로 끝내어 돌려말하는
조선일보 같은 더럽고 추잡한 분위기는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곳의 부(富)는 우리의 치부(恥富)가 아닌
청부(淸富)로 받아들여졌으며, 실제로 모든 부가
그렇게 축적된 것이었다.
이 땅에 총리감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라는 한탄을 자아내게 만든
두번에 걸친 총리인준실패는
이 땅의 기준(이것이 올바른 기준이다)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였고 그래져야만 했다.
- 그러나 거부의 주축세력인 한xx당이
과연 저러한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또다른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
개인의 '부'가 '청부'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의 부를 시기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현 상황에 만족하고
(물론 이것도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가능한 얘기다.
최저생계비(여긴 그런 개념이 없지만)만 받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기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다)
자신의 현 상황에서 여가를 즐기고 자식을 키우고
현재를 즐기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사회에 있을 때 혐오스러웠던 많은 논쟁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곳에 와서 서양사총론을 읽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굳어진 생각이다)
60년동안, 아니 길게는 500년간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허식과 위선, 그릇된 가치관들이
이제 저 극동의 작은 땅덩어리에서도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되고 있구나,
이제 우리도 우리만의 올바른 가치관으로
올바른 사상체계와 올바른 경제관을 세울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저 더러운 진흙탕의 싸움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여, 5년전 이미 검증된 병역문제를
또다시 끄집어내어 짜증스럽다고 하지 말지어다.
저 시끄러운 소리는 소음이 아니요,
그동안 '그러려니...'하고 눈감은채 지나가던
우리들 안의 더러운 타협주의와 몰상식이
봄볕에 두꺼운 얼음이 쪼개지듯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리니
그대가 할 일은 다만
저 즐거운 소리 안에서 옥석(참과 거짓)을 가리고
저보다 더 많은 소리가 우리 안에서 터져나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 어느 시인의 말과 같이
우리를 단단히 옥죄고 있던 그 모든 '껍데기'들에서 해방되어
참다운 자유와 진리, 상식을 세우는 일 뿐이리라.
진리에 이르는 길은 조용하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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