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마음의 흔적들 1997/10/26 02:35
유치원 대신 다닌 미술학원에서는
밑그림을 항상 노란색 크레파스로 그리게 했다.
하지만 난 언제나 사람들의 옷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사촌누나가 그랬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사람이 있어. 너처럼 노란색을 좋아했대.
그 사람이 그린 해바라기라는 그림 봤니? 고흐가 노란색에 미쳐서 그린 그림이야.
노란색을 좋아하면 천재라고 하던데...."
"천재의 색"이라는 누나의 한마디 때문에 노란색에 그렇게 집착한건 아니었다.
하얀 도화지에 이런 저런 색들을 칠하다보면 항상 도화지는 거무튀튀해졌었다.
그럴때마다 난 당황스러웠다. 왜 나는 남들처럼 색깔이 예쁘지 않을까.
하지만 노란색 크레파스는 그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아무리 칙칙한 그림이라도 노란색 크레파스로 몇번 칠해주기만 하면
도화지에 다시 생기가 돌고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제서야 나는 휴우~ 한숨을 쉬며 당황했던 마음을 안정시켰다.
중학교 1학년때 우리 옆반 선생님은 미술선생님이셨다.
언젠가 친구들이 그 선생님이 보라색을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하면서
점수를 잘 받으려면 보라색으로 그려야한다며 농담하는걸 들었다.
어깨너머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수채물감 상자 안에 있는 보라색을 꺼내봤다.
노란색과는 다른......참 아름다우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변태적인 색이었다.
그 나이에 보라색을 보면서 내가 왜 붉은 피를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까지 노란색으로 모든 것을 그려내었던 나의 취향은
이제 보라색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을 지닌 내가
그렇게 보라색에 집착하게 된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색이 노란색에서 보라색으로 옮겨지는 시기와
내가 세상과 사람, 사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기와는 거의 일치하지
않나 싶다. 그만큼 보라색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준다.
노란색을 쓰면 그림이 밝아졌지만
보라색을 쓰면 그림이 점점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우울한 색조가 좋았다.
어떤 사물에 대해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가진건 보라색을 볼때뿐이었다.
그리고 그 우울의 뒷면에 감추어진....보라색을 볼때마다 내가 느끼는
피의 이미지와 에로티시즘, 니힐리즘.....그것들이 마약처럼 나를 이끌었다.
보라색은 그만큼 신비한 색이었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내가 보라색을 볼때마다 좋아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아무도 보라색을 빨강과 파랑의 조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보라색은 보라색일뿐"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항상 보라색을 보면 붉은 색과 푸른 색이 분리되어 보였다.
그 색감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붉음과 푸름을 두 실체를 분리해낸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쾌감이었다. 마치 남들은 엿보지 못한 비밀을 나혼자 엿본듯이.
이제는 보라색에 대한 호감이 검은색으로 옮겨지고 있는 듯 하다.
무슨 물건을 사더라도 검은색으로 된 것을 산다.
예전에 그림을 그릴때는 노란색과 보라색....내가 좋아하는 색을 많이 썼지만
검은색은 절대로 쓰지 않았다. 모든 색을 죽이고 화면 전체를 장악해버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림을 그릴일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그 검은색의 "장악력"이 좋다.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장악력"과 "은폐력"을 좋아한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한 것이 보라색에게서 그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는....
관음증적인 이유에서였다면,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은
거꾸로 그것이 나를 감추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몰개성....
검은 티와 검은 바지, 검은 재킷을 입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가끔은, 그 "편안함"이라는 것이 엄마의 뒤에 숨은
아기의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는데 대해
걱정스러움이 들기도 하지만, 검은색은 나를 감춤으로써 그만큼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노스트라다무스가 "모든 세기"에서 각 시대를 상징적인
몇단어로 표현했던 것처럼,
나의 성격의 변화도 "색깔"로 상징되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좋. 아. 하. 게. 될. 색은 어떤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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