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책 2005/09/26 15:00

(원제 : Energy and Equity)
* 이반 일리히 지음
* 박홍규 옮김
* 미토 펴냄
* ISBN 8990687209
* 8,000원
자전거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다보니 한겨레21 지난호(2005.6.28)에 자전거특집이 실렸다는 걸 발견했다.
박홍규 교수가 쓴 글에서 그가 자신이 번역했다는 이 책을 가볍게 언급했길래 제목도 재미있고, 나름대로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자전거를 타는 '이유'라든가 '철학' 따위를 익혀두어야할(?) 무의식적인 호기심도 발동했고 해서 책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말랑말랑한 제목과는 다르게 이 책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이 책의 원제는 Energy and Equity다. Justice와 더불어 서양시민사회 형성철학의 두 축 중 하나인 형평(Equity)을 제목으로 단 책이 말랑말랑할리 있겠는가?)
원래 이 책을 옮긴 박홍규 교수는 제목을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고 지으려 했단다. 출판사의 제안으로 '사회주의'를 '행복'으로 바꿔서 출간했다는데 굳이 말랑말랑한 제목으로 바꿀 바에야 박교수가 의도했던 '사회주의...'라는 제목이 책의 정치성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역자후기를 포함하여 150쪽에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녹녹치 않다. 생각이 많고 섬세한 사람일수록 언어가 복잡해지기 때문일까. 의외로 문장 읽기부터가 쉽지 않다. 각 장(章)이 다섯장 남짓의 짧은 분량인데도(총 10개장) 쉽게 읽히지 않는 것은 당혹스럽다.
어렵게 읽히는 문장을 우둑우둑 생쌀씹듯 거칠게 읽어내려가다보면 어렵사리 저자의 주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그 주장의 색다름(급진성, 좌파성이라는 말 대신 '색다름'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에 당황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에 몰입하기보다 적정한 기술의 '한계'를 고민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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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를 공부하면서 going-concern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문리적 지식만으로 가득차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회사나 자본이 영속할 수 있는가, 무한히 팽창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기업의 성장과 쇠퇴라는 개념으로 그 흥망성쇠를 설명하긴 하지만 회계를 비롯한 모든 주류 경제학에서는 항상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국회와 정부에서 성장률이 3%네 4%네 따지는 것도 결국 이러한 '성장주의'의 그늘이 아닐까.
일리히의 본문은 이러한 무제한적인 성장과 기술에 적절한 '한계'를 인정하고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그에 따른 '제한'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고, 뒤에 붙은 박홍규 교수의 역자해설은 고도의 성장과 기술발전이 야기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자해설은 그 자체로 또 한편의 소논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완결성이 있다)
일리히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박홍규 교수의 역자해설에 나온 '사회적 비용'에 관해 먼저 이해하는 것이 유용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해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도성장과 기술발전은 필연적으로 수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불평등을 주고 그것이 야기하는 악영향(외부불경제) 가운데 발생자가 부담하지 않는 나머지 부분이 '사회적 비용'으로서, 사회가 부담해야하는 기회비용이라는 것이다.
역자가 든 예를 보자.
두 사람이 보행으로 길을 다닐 때는 서로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탄다면 다른 보행자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지만 그 피해는 자전거도로를 설치한다든지 하여 사회적 비용을 조금밖에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자동차의 경우는 그것의 소유가 만민의 천부적 자연권이 아닌 이상 경제적 지위에 따라 소유여부가 달라진다. (이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행자를 위한 전용도로건설이 불가능에 가까운데 비해 자동차소유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터무니 없이 낮아 결과적으로 자동차소유자가 보행자의 안전과 보행의 자유라는 인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국이 이민자들을 통해, 그리고 세계가 중국과 인도를 통해 끊임없이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는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와도 맥이 닿아있는 얘기다. (중국과 인도의 23억 인구가 다 중산층이 된 뒤에는? 지금 우리의 세계는 그 후에 따라올 필연적인 세계경제의 쇠퇴를 미리 각오하고 있는가?)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일'만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원(그것이 자원이건 노동력이건)을 공급받아야 한다. 한 나라 내부에서 그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을 때 자본은 그 나라를 떠나 자신의 '성장'을 보장해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간다. 자본에 국경이 없다는 말도 이러한 의미다.
박홍규 교수의 역자해설은 바로 여기까지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 다시 앞으로 책장을 넘겨 일리히의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성장'과 '기술'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일리히는 '적절한' 한계와 제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제1장 맨 앞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에너지 위기라는 말은 그 기저에 인간은 선천적으로 노예를 필요로 한다는, 그래서 에너지 위기란 사실 '노예에게 먹일 사료의 부족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말.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구원은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며 사제직 확대를 반대하여 사제직을 버린 전직 가톨릭신부인 그의 기본 입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햇빛으로부터 광합성을 하여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그 범위 안에서 소비를 하는 동식물과 같은 생태근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 속에는 장애인, 극빈층을 위해 자동차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거나 공공교통의 확충이 교통수단의 최고속도를 높이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등 사회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잉산업화를 비판하지만 저설비로 인한 야만상태를 거부하는 '당연한 정도의' 합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교통수단의 사유화가 필연적으로 그것의 소유계급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그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서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1974년에 초고가 쓰여졌으니 30년전의 주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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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자전거'만을 위한 예찬서가 아니다.
물론 여러 서평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자전거가 인체의 에너지 소비와 이동거리의 극대화를 조화시킨 이상적인 운송수단임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책의 후반부에 일부 등장하는 내용일 뿐이다.
운동에 재미를 붙이기 위해,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운동을 하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얇은 책이지만 내가 그 안에서 만난 철학은 내 몸이 아닌, 자본주의와 성장주의의 무제한적인 폭주에 거부하고자 하는 한 지성인의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문명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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