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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던 출근길을 음악 듣는 출근길로 바꿔버린 iPod를 제치고
나의 출장길을 송두리째 점령해버린 책이 한권 있었으니
이름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란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프레시안의 동북공정 해설기사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어떤 논자가 동북공정에 대해 댓글을 달면서 언뜻 이 책을 언급했던 거다.
우리의 통념인 한민족 북방기원설과 배치되게,
한민족 남방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 흥미로워
호주 가서 읽으려 교보문고를 찾았는데 아쉽게도 찾질 못했다.
결국 귀국한 뒤에야 서가에서 발견되더군.

........

나는 솔직히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입장이다.

나 역시 한단고기를 읽고 저 중원이 온통 우리'민족'의 古土였다는,
심지어 수메르인들에게까지 한민족의 문화가 미쳤다는 주장에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묘하게도 내 자신이 외부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았을 때인 고교시절과 중첩되어 있고
대학에 와서 자유로운 생각, 열린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증적이고도 과학적인, 객관화된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그러한 나의 옛 믿음들이 한편으로는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타인(타민족)들과의 마찰을 필연적으로 예정하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무서운 것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와중 인터넷과 (결정적으로) 고종석을 통해 자유주의를 학습하고
'민족' 개념의 신화가 깨지는 격정적인 경험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극우와 좌파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족' 개념을 이야기한 것은
이하에서 편의상 지칭하는 '한민족'이라는 말에 대한 개념정의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한민족 남방기원설'에 대한 효용성(?)이랄까
평가 같은 것을 내 나름대로 내려보기 위한 이유도 있다)

이하에서 쓰는 '한민족'이라는 말은
5천년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화하기 위한 '민족' 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古來로 한반도에 정착해 거주했던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속지주의적인 민족 개념이 강하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실제로 이 책 역시 어디서도 '한민족 단일민족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남방유입 6, 북방유입 4, 중국유입 10% 미만 정도로
(속지주의적인 관점에서의) '한민족'을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가 20여년동안 UN식량농업기구 공무원으로
전세계 오지와 소수민족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에 의거해 쓰여진 이 책은
분명히 엄밀한 실증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허술한 점이 눈에 띤다.
다소 견강부회하는 면도 없지는 않고...

그러나 김수로의 아내 허황옥 이야기가 전해주듯
그동안 주류사학계가 간과해왔던,
설령 언급하더라도 (신라와 고려의) 국제성 개념으로 설명해왔던
남방문화 유입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필자가 내린 결론(가설)은
지금의 흑해 또는 소아시아쪽의 사람들이
중동 - 인도 - 인도차이나 반도 - 쿠로시오난류를 통해 한반도 유입
이상의 순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고
이들의 문화가 기존에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던 소수의 선주민들의 그것보다 우월했기에
(농경, 제사풍습, 무기 등)
이들의 문화가 오늘날 '한국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문화양식의
원류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까지 주장된 '북방기원설'은 어떻게 봐야할까.
필자는 위에서 말한 중동 ~ 한반도유입의 대장정이
한반도에서 멈추지 않고 더 북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들이 그곳에서 세운 부여와 고구려 같은 국가들로 인해
우리가 북방기마민족이라는 오해가 생겨났으며
실제로 언어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우리가 초원의 몽고인들과 유사한 점은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그의 가설대로라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한민족이란
(멀리서부터) 소아시아, 중동, 인도,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 중국 운남성쪽에서 온 사람들이며
한반도와 그 일대에서 머나먼 대장정을 마친 사람들은
내륙(중국)기원민족의 확장으로 인해
중동 ~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긴 루트(이를 필자는 '한국인의 남서통로'라 이름붙인다)에서 끊긴 채
한반도 안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물론 자료검증 과정에서 비전공자인 내가 보기에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민족이 어떻게든 남방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나의 흐릿한 생각이
점차 구체화되어 진실이 보이는 것 같은 경험이
나의 출장길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우려가 든 것도 사실이다.

우선은, 마치 이 책이 한때 일각에서 불던 '한단고기' 열풍처럼 잘못 해석되어
'우리민족은 유럽인과 형제다'라는 억지가 대두될 수 있다는 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이 제시된다면
그 주장의 기저에는 '오늘날 선진국인 유럽과 한국을 동등한 민족'으로 놓고 싶어하는
패권주의적인 의식이 깔려있으리라 본다.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이 책이 출판계를 강타했다는 얘기는 아직 없으니까)
이 책이 어린 학생들(?)에게 한단고기나 규원사화가 먹히듯 먹혀들어간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기 위해 치우 얘기를 들먹이면서
'중국땅은 다 우리꺼였다'라는, 북방기마민족설에 기반한 한민족 패권주의가
'한국인은 유럽인과 형제다'라는, 더 웃지못할 형태의 것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하나 우려스러웠던 점은
이 책이 강조하는 부분이 '한민족 남방유입설'이다보니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 전체가 완전히 남방에서만 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필자는 한민족과 그 문화는
남방 6, 북방 4, 중국 10% 미만 정도의 구성비를 갖는다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민족 단일기원설'이라는 신화를 깨는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히려 이 책을 자세히 읽은 사람이라면
오늘날 한국문화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라는 것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을 깨닫고
문화의 들어오고 나감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그들이 고구려땅을 먹어치우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의 그러한 전략이
민족주의가 강한 이 동북아에서 걷잡을 수 없는 민족대립을
- 민족과 국가가 1:1로 대응하는 동북아에서 민족대립은 즉 국가대립을 뜻한다 -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책이
20여년 동안 호기심과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집필에 임한 위대한 필자의
'始原과 진실'에 대한 보고서로서 읽히기만을,
또다른 민족패권주의의 사상교본으로서 그릇 쓰이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뒤늦게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처럼 최소한의 과학성마저 저버린 정치종속적인 '도구적' 역사관이 아니라
역사의 相當因果關係에 따라 객관성과 분별력을 잃지 않는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홉스봄식의 역사관일테다.

ISBN 8973304720
2004/09/15 20:25 2004/09/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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